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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여! 담배보다 대마초를 주장하자!!

노동자들이여! 담배보다 대마초를 주장하자!!
지난 몇 십년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빠르게 민주화되어왔고, 금기시되어 왔던 대부분의 것을 하나둘씩 허물어 왔다. 그러나 마약에 관해서는 여전히 다른 목소리나 의견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은 마약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를 얻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억압과 통제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른바 민주화의 진전으로 억압과 통제의 토대가 붕괴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관해서만은 여전히 이런 사회적 합의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출판된 「대마를 위한 변명」(유현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깨고 그 유해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합법적인 약물로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는 담배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고 대신 법으로 금지된 약물 대마초의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고 상당부분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담배와 대마초...그 존재의 이유...

흡연가들이 담배를 피우는 큰 이유중 하나는 바로 니코틴을 체내에 흡수하기 위한 것이다. 특별히 긴장되어 있을 때, 집중력이 요구될 때, 무척 초조할 때, 니코틴 중독자들은 다량의 니코틴 공급의 충동을 느끼게 되며 니코틴은 뇌의 신경을 자극하고 억제하는 작용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등의 일시적인 진정효과를 제공한다.

일단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니코틴의 진정효과는 모세혈관과 말초혈관의 수축, 혈압의 상승, 심박동 항진, 신경 자극, 위산 분비 증가 등 다양한 부정적 효과를 동반한다. 과다 투여시에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독성물질이며 금단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주범으로 중독성이 강한 물질이기도 하다.

대마초는 니코틴이 아닌 THC성분이 진정효과가 준다. 하지만 담배의 니코틴이 흡연자에게 줄담배를 피우게 할 만큼 보잘 것 없는 효과를 제공하는 반면 대마초의 THC성분은 연속으로 피울 필요가 없는 충분한 효과를 보장한다. 이것이 니코틴보다 THC가 더 유해한 물질이라는 것은 아니다. 담배가 피울수록 해로운 것은 니코틴의 과다공급보다는 별도로 연기에 포함된 알 수 없는 유해물질들이 몸속에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줄 담배는 피울 수 있지만 줄 대마초는 피울 수 없다. 대마초는 한대를 말아서 두세명이 나눠서 피우고도 1시간 이상 효과가 계속된다. 대마초는 담배만큼 자주 피울 수 없고 당연히 담배보다 연기를 훨씬 덜 들이마시게 된다. 폐암의 위험도 그만큼 훨씬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대마초는 필로폰이나 코카인 같은 독성 마약과 다르고 엘에스디나 엑스터시 같은 환각약물과도 다르다. 또한 중독성이 적어 금단현상도 없다.

대마는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 무려 5백 마리의 양을 때려잡아야 했던 잔혹한 시기의 종말을 고하고 7백년 동안 이슬람에서 종이의 가장 중요한 원료고 대접받아 왔으며, 키우기도 쉬어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삼베'를 만들어냈으며 또한 천식, 녹내장, 종양에서부터 스트레스, 편두통에 이르기까지 치료제로도 널리 인정을 받아 왔다.

이렇게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벗이었던 대마는 지금 마약으로 구분되어 많은 사람들은 담배나 술보다도 대마초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
노동자 계급에게 적은 비용으로 큰 기쁨을 줬기 때문이라고?


종합해 보면 대마초도 분명히 몸에 해롭지만 담배보다는 훨씬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용되어 있고 대마초는 그토록 비참하게 인류의 역사에서 급격하게 사라져간데는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적대시한 가장 큰 이유가 담배는 현실을 겨우 견뎌낼 만큼의 적당한 기쁨을 주지만 대마초는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과한 기쁨을 줬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진보와 혁명'으로 상징되는 대마초는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자본주의는 그래서 노동자 계급에게 대마초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대마를 위한 변명」은 '법으로 금지된 약물'로 정의되는 마약중 하나인 대마에 눈을 돌리고 그를 꿈꾸고 있다. 금욕을 강요하는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참으로 불온한 상상이다.

대마를 위한 이유있는 변명...

대마초의 억울한 역사적 뒷배경을 살펴보자.

1937년 미국에서 '마리화나 세금법(Marijuana Tax Act)'이 제정되고 대마초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앞장섰던 사람은 연방마약관리국의 국장인 헨리 안스링거였다. 그의 처삼촌인 멜론은행의 은행장 앤드류 멜론은 안스링거가 대마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펼치는 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멜론은행의 대고객중의 하나인 화학자본의 소유주 듀퐁의 이해관계도 무시하지 않았다.

화학섬유를 개발해 재미를 보려던 듀퐁에게 최대의 적은 대마였다. 대마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유일한 천연섬유였고 나일론과 레이온의 시장 진입을 막는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여기에 대마초가 마약이 되고 대마의 생산과 판매를 대대적으로 억압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더욱이 목재 펄프 사업에 뛰어들었던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까지 개입해 모든 언론과 영향력을 동원, 대마초의 위험을 과장 선전하면서 대마 펄프의 공격적인 시장 확장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특히 허스트는 인종차별주의를 교묘하게 끌어들여 대마초를 유색 인종이나 찾는 저급한 환각물질로 사회에 인식시키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결국 대마초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이면에서 대마 산업의 몰락과 함께 화학섬유와 목재 펄프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마초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대마산업을 죽이고 자신들의 자본을 축적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려고 대마초를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면서 대마초 흡연자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자 안스링거는 급기야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려고 대마초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지만 매카시즘(1950년대 초반에 미국 의회 상원의원 매카시(J. R. McCarthy)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반공산주의 바람) 열풍과 맞물려 그 누구도 쉽게 반발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반 정부세력을 탄압하는데 대마초 금지법이 적극 활용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유행처럼 대마초가 번져 있었고 누구든 걸면 걸리는 상황이었다.

최근 공개된 1972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대마초가 개인이나 사회에 유해하지 않으며 대마초의 생산과 유통을 규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그 해 대마초 흡연 혐의로 무려 42만명을 잡아들였다.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미국에서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1500만명을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기준으로 마약 사범은 모두 5594명, 이 가운데 대마 사범이 1302명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마초를 피우다 걸리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미국을 따라 대마초를 금지하고 지금까지 그 법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무조건 처벌과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1976년 대마초 합법화 이후 우려하는 것과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대마초 흡연 인구가 오히려 크게 줄었고 필로폰이나 코카인의 흡연 인구도 줄어들었다는 통계를 발표하였다. 2000년대 들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이 대마초를 합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금욕과 대마초...

금욕을 무기로 노동 이외의 것을 적대시했던 청교도주의는 노동력의 착취를 정당화했고, 자본가 계급의 탄생과 자본의 축적, 발달에 기여해 왔다. 금욕은 자본주의적 직업윤리인 동시에 생산력 증진의 원천이 되어왔지만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양대 계급인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에게 공히 적용되지는 않아 온 것이 사실이다.

금욕을 둘러싼 계급간의 불화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부단한 투쟁의 역사로 이어져 왔고 대마초는 바로 그 억압과 저항 사이에 위치해 왔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진보세력들이 대마초를 피우며 보수권력에 대항했던 것도, 대마초가 반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풀이 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권력이 보수적일 때도 대마초에 대한 탄압이 그만큼 더 혹심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대마초를 통해 얻는 과다한 기쁨은 금욕의 파트너인 물질적 소비의 기쁨을 희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소비는 금욕과 마찬가지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마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협하는 존재로 비춰지기 시작하였고 대마초를 거두는 대신 담배를 내밀은 것이다.

담배는 대마초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극적으로 완화시키면서도 대마초와 유사하게 작용하였으며 대마초보다 더 해롭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노동에도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여! 담배보다 대마초를 주장하자!!

우리 사회에서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금욕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나라이다.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들로 인식되어져 왔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얻은 것은 망가진 육체와 정신, 그리고 그 대가로 얻은 한 움큼도 되지 않는 떡고물뿐이었다. 금욕의 열매는 온전히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돌아가 노동자만을 방탕하게 만들어 갔다.

그리하여 우리사회가 얻은 것은 70%대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흡연률과 40대 사망률 1위, 주당 55.1시간에 빛나는 세계 최강의 노동시간뿐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금욕주의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더 많은 사람이 덜 일하고 남은 시간을 즐겁게 사용하되 소비와 향락이 아닌 건강과 건전한 상상이다. 그 가운데 담배가 아닌 대마초가 있다.

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