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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용화, 국가경쟁력에 도움 안돼

“영어 공용화, 국가경쟁력에 도움 안돼”
박영준 교수 등 학자 5인, 문화관광부 연구보고서 출간
미디어다음 / 이성문 기자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싱가포르 한 초등학교의 게시판. [사진제공= 한국문화사]
LG전자가 사내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겠다고 선언하면서 영어 공용화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LG전자는 “해외 매출비중이 8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업무에 영어를 쓰지 않아 발생하는 낭비요인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2008년까지 공문서, 이메일 작성, 사내 교육 등을 영어로만 실시할 계획이다.

영어를 공용화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8년 소설가 복거일씨가 한 일간지에 영어 공용화를 제안하자 한 때 학술 현장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2002년 정부가 제주를 국제자유도시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방안은 문화관광부의 내부 반발로 영어 서비스를 강화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모든 표지판과 안내서가 영어로 쓰여 있고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영어로 길을 물어도 술술 설명해줄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외국인들이 살기 아무런 불편이 없어 해외 투자가 쇄도하는 대한민국이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향’이 실현될 수 있을까? 아니 실현 여부를 떠나 정말 우리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섯 명의 학자들이 동남아 영어 공용화 국가들을 직접 돌며 실증적으로 연구한 자료가 도움이 될 것 같다. 부경대 박영준 교수(국어국문학) 등 학자 5명은 문화관광부의 2003년 국어정책 연구과제로 수행한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국가의 언어실태와 문제점' 보고서를 보완해 '영어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한국문화사)을 지난 7월 출간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아무런 역사적 사회적 배경 없이 영어를 공용화할 경우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불확실한 경제적 이득보다 사회 운영의 체계를 개편하는 데 들게 될 비용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국가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책의 일부를 발췌 요약해 소개한다.


영어 공용 국가 중 3개국만 1인당 국민소득 우리에 앞서

동남아시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나라의 공통점을 보면, 영국이나 미국에 의한 식민지 경험이 있는 다민족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랜 기간 식민지 경험을 통해 영어 사용 환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 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국가 통합을 이루기 위해 토착어가 아닌 영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국가 경쟁력의 향상을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

국가 경쟁력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측정될 수 있지만 가시적인 것이 경제력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영어 공용화와 국가 경쟁력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통계 자료를 통해 볼 때, 영어 공용화 국가 중 우리보다 경제력(GNI, 1인당 국민총소득 기준)이 높은 국가는 뉴질랜드, 싱가포르, 아일랜드 정도이다. 영어를 모국어가 아닌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47개국 중에서 3개 정도의 국가만이 경제력에서 우리보다 앞섰고, 나머지 국가의 경우는 하위권에 속한다. 이러한 통계는 영어 공용화가 국가 경쟁력의 향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경제적 토대가 있다면 영어 공용화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현재 국제 사회는 영어권 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영어 공용화를 시행할 경우 영어 공용화 국가 중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세 나라(뉴질랜드, 아일랜드, 싱가포르) 정도의 경제력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야 한다.

이때 인구의 70%가 영국계 백인이고, 천혜의 자연을 갖춘 뉴질랜드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한국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국가 경쟁력과 영어 공용화의 상관 관계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줄 수 있는 국가는 싱가포르 정도다. 싱가포르는 국제적인 무역 도시로 세계 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무역 종사자 아니다
 
싱가포르의 한 학교명이 4개국어로 쓰여 있다. [사진제공= 한국문화사]
싱가포르는 19세기부터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교량 항구로서 역할을 해온 도시 국가이다. 현재 싱가포르는 인구 400만의 도시 국가로 균질적인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다. 싱가포르에 비해 한국은 남북한 7000만의 인구를 가진 국가이다. 중심축을 무역이나 공업에 둘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농업, 공업, 상업을 동시에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싱가포르처럼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국제 무역의 중추 역할과 보조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인도나 필리핀처럼 인구가 많고 국토가 넓은 국가의 경우, 영어 공용화가 국가 경쟁력 향상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국제 비즈니스의 중심축이 된 영어 공용화 국가를 찾을 수 없다. 반면 영어 공용화 국가가 아닌 중국의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중국의 상하이와 일본의 도쿄는 아시아 금융 시장 및 비즈니스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외국 자본의 투자 조건의 우선 순위가 시장성이지 언어 소통의 가능성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특히, 한국 기업조차 시장성을 좇아 중국으로 대부분 진출한 상황을 볼 때 영어 공용화가 외국 자본의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문화 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있어서 영어 공용화의 이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영어 공용화가 되면 우리의 우수한 문화 상품을 곧바로 국제 시장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영어 공용화 국가에서 독자적인 문화 산업이 발달한 나라를 찾기가 힘들다. 문화적 기반이 취약한 나라는 미국 및 영국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처지이며, 문화적 기반이 갖춰진 인도의 경우에도 주체적인 문화 산업이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필리핀의 경우 일년에 상영되는 총 영화 중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30편을 넘지 않는다.


싱가포르 영어 사용자 50% 미만
 
영어와 타밀어를 표기한 택시 [사진제공=한국문화사]
영어 공용화가 곧바로 모든 국민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발음, 문법 등의 영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은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고급 영어를 구사하기 힘들다. 영어 공용화 국가 47개국 중 영어 사용자(영어를 제 1언어, 혹은 제 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의 비율이 50%를 넘는 국가는 16개 나라에 불과하다. 싱가포르의 경우에도 제 1언어와 제 2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전체 국민의 50%를 넘지 않는다.

영어 공용화를 실시해서 국가 경쟁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약화되었다고 증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는 영어 공용화 정책이 국가 경쟁력을 염두에 두면서 시행될 정책이 아님을 말해 준다. 영어 공용화를 시행한 국가들은 해당 국가의 정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국가 통합의 필요성 때문에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가 경쟁력 향상을 명목으로 실시하는 영어 공용화 정책은 그 인과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더구나 영어 공용화 정책을 시행한다면 영어로 운용되는 행정 체계와 교육 체계를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영어 공용화를 통해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 불확실한 경제적 이득보다 사회 운영의 체계를 개편하는 데 들게 될 비용은 보다 분명하고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어 공용화론 대만, 일본서도 ‘시들’
한때 영어 공용화론이 제기되었던 대만과 일본에서도 그 열기가 점차 식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만에서는 지난 2002년 4월 교육부장(장관)이 영어를 제 2의 공용어로 하는 ‘6개년 국가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늦어도 10년 내에 영어 공용화를 확실하게 실현할 방침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만 정부는 이러한 영어 공용화 방침에서 다소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2005년부터 유치원생에 대한 영어 교육을 전면 금지하고 모국어인 대만어와 공용어인 보통어만 교육할 수 있다. 이는 그 동안 대만에서 취학 전 아동에 대한 영어 교육 열풍이 지나쳐 모국어 교육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어서 생긴 문제점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바로잡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2000년 1월 오부치 게이조 당시 총리의 개인 정책 자문 그룹이 ‘21세기 일본의 구상’이라는 일본의 영어 공용화 가능성을 발표했다. 하지만 각계에서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산케이신문은 ‘21세기 일본의 구상’이 실현될 경우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낸 바 있다. 이 발표가 있은 지 4년이 지난 현재 일본에서는 영어 공용화 논의가 추진력을 상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