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보기

울다가 울다가… 딸 따라간 아빠들

울다가 울다가… 딸 따라간 아빠들
성수대교 붕괴 10년 '사회적 살인' 그 상처
김봉기기자 knight@chosun.com
장상진기자
jhin@chosun.com
 
 
“사랑하는 아빠 보세요. 아빠, 저는 요즘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아빠가 저를 때리셨을 때 제 마음보다 100배, 1000배나 더 마음 아프실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빠! 저를 때리신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제 속에 있던 나쁜 것들을 때려서 물리치신 거라 생각하세요. …아빠, 저를 위해 한번 더 마음을 풀어주시지 않겠어요?”

1994년 10월 21일. 가장(家長) 이식천(당시 46세)씨는 하늘나라에서 보낸 딸의 편지를 받았다. 딸 연수(당시 16세·무학여고2)가 아침 등교 도중 성수대교와 함께 추락한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숨을 거뒀다는 비보(悲報)를 들은 지 몇 시간 뒤. 빗물과 강물에 젖은 채 돌아온 가방 안에는 소소한 잘못으로 아빠에게 매를 맞고 눈물로 쓴 편지가 고이 접혀 있었다. 딸을 잃은 후 자책할 아빠를 안쓰러워하듯이, 편지는 “아빠도 파이팅! 이에요?! 94년 10월 20일 아빠를 사랑하는 연수가 드려요”로 끝을 맺었다. 이날 아빠는 딸아이 가방을 가슴에 품고 엉엉 울었다.

▲ 왕복 8차로로 복원된 성수대교를 남단에서 바라본 모습. 79년 10월 동아건설이 만든 성수대교는 붕괴 사고 이후 96년 3월 완전 철거됐다. 이후 현대건설이 재시공에 들어가 97년 7월 4차로로 1차 개통된 뒤, 확장공사를 거쳐 지난달 17일 8차로로 넓어졌다.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그후 10년….

수소문해 찾아간 집은 사고 때와 달랐다. 이웃들은 사고 이듬해인 95년 서둘러 이사를 했다고 전했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파트 창문에서 새로 단장한 왕복 8차로의 화려한 성수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때는 허리가 잘린, 그리고 딸을 삼킨 흉물스런 다리였을 것이다.

불과 몇 백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사한 집은 한강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였다. 어머니(52)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성수대교 사고 직후 굴지의 대기업 이사로 스카우트될 만큼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했지만 2년 후 힘없이 숨을 거뒀다고 했다. 착한 딸 연수의 ‘파이팅’ 당부를 들어주지 못한 회한을 남기고. “(연수 아빠는) 아침에 일어나면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울고, 회사에서도 남 몰래 울었어요. 밥을 먹다가도 통곡을 하고,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가 보다 하고 바라보면 훌쩍훌쩍 울고 있고…. 그렇게 2년을 살다 중병에 걸려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는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묘지 딸 연수의 묘지 인근에 안장됐다.


▲ 아빠에게 편지 남긴 이연수양 무학여고 교정에서 찍은 사고 전 이연수양의 사진. ‘14가지 소원’을 남기고 간 승영씨와 함께 연수양은 성수대교 상판 위에 떨어진 16번 시내버스 속에서숨을 거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사망한 희생자는 32명. 이 가운데 9명이 시내버스로 등교하던 10대 중반 무학여중고(서울 성동구 행당동) 학생들이었다. 세상은 망각을 통해 아픔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가족을 가슴에 묻은 유족들의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곪아들어갔고,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연수양과 함께 16번 시내버스 속에서 숨을 거둔 장세미(당시18세·무학여고3)양. 무학여고는 사고 이듬해인 95년 2월 세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취업반’에 들어간 세미였다. 졸업식날 딸 대신 명예졸업장을 받은 아버지 장영남(성수대교 사고 당시 49세)씨는 “나중에 야간대학에 들어가 교사의 꿈을 이루겠다고 했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4년 후인 99년 8월 18일. 성수대교 북단에 세워진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본 희생자 위령비에는 딸 ‘장세미’ 이름이 20여㎝ 크기로 새겨져 있었다. 그는 유서도, 가족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세상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세미양 오빠(34)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것이고 세미는 좋은 곳에 갔을 것이다. …낙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근황을 묻자 “어머니의 평정심을 건드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기자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평정심’은 삶을 지탱하는 팽팽한 끈과 같으니까. 아버지 시신은 세미가 그랬듯 화장(火葬)됐지만 뿌려진 자리는 달랐다. 오빠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목수였던 강용남(당시 52세)씨. 경기도에서 서울 강북으로 출근하던 중 성수대교 붕괴로 목숨을 잃었다. 부인(62)은 지난 82년 장만한 15평짜리 아파트를 지키고 있었다. 사고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딸은 이제 대학 4학년생이다. 부인은 “사고 후 6~7년간 딸아이와 남편 이야기를 한번도 안 했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남편과 함께 자던 안방에서 잠 잔 적이 없고, 전철을 타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 성수대교가 안 보이도록 고개를 돌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남편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딸 아이가 장성한 최근 사진이었다. “아, 이거요? 작년에 찍은 우리 모녀 사진에다 딸이 아버지 생전 사진을 합성(合成)해서 만든 것이지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아빠가 그리웠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