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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념

[명상강론]각성의 순간과 직면하라

[ 질문 ]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해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시다. 이것은 모든 사물, 모든 행위를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저는 일하는 동안에 깨어있기로 결심했지만 자꾸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제가 깨어있지 못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마치 큰 실수를 범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일하는 동안에 깨어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부딪치는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일은 그대자신을 완전히 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일에 깊이 몰두해야 한다. 마치 그대자신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전적인 몰입이 없으면 그대의 일은 표면적인 차원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림, 시, 건축, 조각 등 다방면에서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위대한 작품들은 전적인 몰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일을 하는 동시에 깨어있으려고 노력한다면 그대의 일은 최고수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그 일에 깊이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하는 동안에 깨어있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련을 필요로 한다. 먼저 그대는 아무 단순한 행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산책같은 경우가 좋을 것이다. 그대는 걸음을 걸으면서도 자신이 걷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걸음걸이 하나마다 깨어있음으로 충만할 수 있다. 먹는 행위에 있어서도.....선원(禪院)에서 차를 마시듯이 해 보라. 그들은 이것을 ‘다도(茶道)’라고 부른다. 차를 마시면서도 주의깊은 의식과 각성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아주 단순한 행위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런 행위들을 통해 시도하는 것이 좋다. 춤이나 그림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행위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일상 생활의 아주 간단한 행위로부터 시작하라. 그래서 깨어있음(awareness)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마치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각성의 상태가 유지되면, 그때에는 인위적인 노력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각성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때에는 어떤 일을 하든, 어떤 행위를 하든 깨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명심하라.-그 각성은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되면 그림을 그리건, 음악을 작곡하건, 춤을 추건, 심지어는 칼을 들고 적과 싸우는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깨어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깨어있음은 지금 그대가 얻으려 노력하고 있는 그런 깨어있음과는 다르다. 이 깨어있음은 처음부터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수행이 절정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것이다.
간혹 아무 수행없이도 이런 깨어있음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경우이다. 날마다의 일상 생활에서 단순한 행위를 통해 시작하는 것이 좋다. 먼저, 깊이 몰입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행위에 대해 깨어있으려고 노력하라. 그대는 걸음을 걸으면서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한다. 이 생각을 깨어있음으로 대치하라.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대가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고 의식하라. 걸음을 걸을 때에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깨어있음으로 대치시켜라. 걷고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걸어라. 아마 그대의 걸음걸이가 다소 느려지고 더 우아해질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행위들을 통해 각성을 훈련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점점 더 익숙해지면 그 다음에는 좀더 복잡한 행위를 통해 시도해 보라. 어느 날엔가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완전히 깨어있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저는 일하는 동안에 깨어있기로 결심했지만 자꾸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대가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을 오랜 수련으로 삼아야 한다. 깨어있음은 억지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제가 깨어있지 못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신이 깨어있지 못했었다는 것을 자각할 때, 그때만큼은 깨어있지 않은가?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라. 나의 가르침에는 죄책감이라는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죄책감은 영혼을 좀먹는 암적인 질병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그대의 존엄성과 긍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그대를 순전히 한 명의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이 죄책감을 이용해왔다.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대가 단 몇초만이라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깨어있음은 그토록 대단한 일이다. 그것을 즐겨라. 각성을 잊고있던 순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나는 깨어있지 못했다.”고 자각한 그 순간에 관심을 가져라. 최소한 몇 시간 후에라도 각성이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라.
그것을 후회와 죄책감, 슬픔으로 만들지 말라. 죄책감과 슬픔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대는 깊은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절망감이 그대 안에 자리잡으면 깨어있음(awareness)은 더 어려워진다.
초점을 바꾸어라. 그대가 각성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좋은 일이다. 이젠 가능한 한 오래동안 잊지 않도록 하라. 다시 그대는 잊었다가 기억하는 것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망각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대의 죄책감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이다. 이 죄책감을 피할 수 있다면,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 날엔가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깨어있음은 호흡이나 심장박동, 혈액순환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하라.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 나무는 카톨릭 성직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다. 만일 나무들이 성직자의 말에 귀기울인다면 그들은 장미에게 “왜 너는 가시를 갖고 있지?”하고 말하면서 죄책감을 심어줄 것이다. 바람 속에서, 비 속에서, 햇빛 속에서 춤추고 있던 장미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슬픔에 잠길 것이다. 춤이 사라질 것이다. 즐거움도 사라지고 향기도 사라질 것이다. 이젠 가시가 장미의 유일한 실체가 될 것이고 “왜 나는 가시를 갖고있을까?”하는 아픔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의 말을 들을만큼 어리석은 장미는 없다. 장미는 춤춘다. 그리고 장미꽃과 더불어 가시 또한 춤춘다.
존재계 전체에 죄책감이란 없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날, 그대는 삶의 우주적인 흐름과 하나가 될 것이다. 죄책감없는 순수한 의식, 이것이 깨달음이다. 삶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즐겨라. 빛이 아름다운만큼 어둠도 아름답다.
죄책감을 느낄만한 어떤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대는 종교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사회에서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한 그대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많은 죄책감을 느낄수록 그대는 더 종교적인 인간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문한다. 단식을 하는가 하면, 피가 맺힐때까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이다. 그들은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종교라고 부르는 것들은 이렇게 가르쳐왔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날 신에 의해 처벌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스스로 벌을 가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신의 형벌은 영원한 지옥 구덩이에 쳐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출할 길은 전혀 없다.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인류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세뇌되었다. 죄책감은 그대의 눈에서 총기를 앗아갔으며, 그대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앗아갔다. 죄책감은 그대에게서 우아함을 빼앗아갔다. 죄책감은 그대를 범죄자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인간은 허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실수를 범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실수는 범하는 것은 인간적이다.”라는 격언을 만든 사람들은 “용서한다는 것은 신성하다.”는 격언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는 두번째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실수하는 것도 인간적이고, 용서하는 것도 인간적이다.”
자기자신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미덕 중의 하나이다. 자기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고통과 죄책감과 가득차 있다. 그러니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소위 성자라고 불려지는 자들은 그대가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이 이미 지옥에 살고 있다! 그들은 신이 그대를 용서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
수피(Sufi)의 시인인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은 ‘루바이야트(Rubaiyat)’라고 하는 시집을 썼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술마시고 춤추고 사랑할 것이네. 온갖 죄를 저지를 것이네. 나는 신이 자비롭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 그 분은 나를 용서해 주리라. 나의 죄는 보잘 것 없고 그분의 관대함은 한이 없으므로.”
성직자들이 오마르 카얌의 시집을 알게 되었을 때.....그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었으므로 모든 책이 수기본(手記本)이었다. 성직자들은 그의 책이 엄청난 신성모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오마르 카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대가 원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신은 자비와 사랑 그 자체이므로. 그대가 칠십 평생에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는가? 신의 관대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오마르 카얌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수학자이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그에게 이렇게 따졌다.
“도대체 이걸 책이라고 썼는가? 당신은 사람들의 종교성을 파괴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라. 신은 공정하다고 말하라. 죄를 지으면 처벌받을 것이요 자비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라.”
오마르 카얌의 책은 불태워졌다. 필사본이 발견될 때마다 성직자들은 즉각 불질러버렸다. 이 오마르 카얌이라는 자는 위험한 사상을 전파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사상이 온 인류에 퍼져나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다면 성직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천국과 지옥, 신이라는 관념으로 가득 찬 그들의 신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것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나의 눈으로 보면, 오마르 카얌은 깨달음을 얻은 수피 신비주의자 중의 한 명이며, 그의 말에는 엄청난 진리가 담겨있다. 그의 말은 그대가 죄를 범해야 한다는 듯이 아니다. 다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지면 다시는 그 일을 되풀이 하지마라.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되면 다시는 그 일을 하지마라. 이것이 전부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후회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벌하거나 고문 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대가 관점을 완전히 바꾸기를 원한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망각했는지 헤아리지 말고, 분명하게 깨어있던 아름다운 순간들에 초점을 맞추라. 그 아름다운 순간들은 그대를 구원하고 치료하기에 충분하다. 그 순간들에 관심을 두어라. 그러면 그 순간들은 점점 더 성장하고 그대의 의식 안에 퍼져나갈 것이다. 서서히 비각성(非覺醒)의 먹구름이 사라질 것이다.
처음에는 일하는 동시에 깨어있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번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올바른 길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XYZ에서 출발하지 말고 ABC에서 출발하라.
우리는 순전히 출발을 잘못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것이 시발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조급하기 이를데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재빨리 이루고자 한다. 사다리의 모든 칸을 밟고 올라가지도 않고 무작정 최정상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러니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의식의 각성같은 문제에 실패하고 나면 그대는 다시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가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의식의 각성’처럼 가치있는 것들은 존재계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준다. 그대를 신의 사원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행할 때에는 아주 주의깊게 시작해야 하고, 정확한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조금 더 끈기를 가져라. 목적지가 멀지 않다.
 
* 출처 : 명상나라(내용: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