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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번호 없이 대한민국서 살 수 있을까

주민번호 없이 대한민국서 살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 이승훈 기자]
▲ 회원정보 유출 사태 이후 회원가입 조건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기로 한 이비에스아이 홈페이지
ⓒ2004 이비에스아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되는 13자리 '바코드' 주민등록번호. 이 번호 하나로 개인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통합 관리하다보니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번호 없이는 못산다. 그 쓰임새도 가지가지이고, 특히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려고만 해도 주민등록번호는 필수다.

지난 14일 기자는 최근 서비스를 시작한 이지스(www.egis.co.kr)에서 지금까지 내가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가 어떤 것인지 검색을 해봤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누군가가 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기자가 한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게임사이트, 포털 등 5개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행히 지금까지 금전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내 주민등록번호가 앞으로도 누군가에 의해 도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꺼림칙했다. 더구나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유출을 막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해왔던 터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문제는 주민등록번호 도용 피해가 일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 정보가 주민등록번호를 중심으로 모이다보니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개인정보유출로 인한 피해는 매일 들려오는 뉴스가 된지 오래다.

주민등록번호 받지 않으면 불법행위 막을 수 없다?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에 접수된 개인정보침해상담 신고 건수는 2002년 1만7956건에서 2003년 2만1585건으로 급증했다. 올해 들어서도 10월까지 1만8178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중 주민등록번호 도용에 관련된 피해상담이 30~40% 가량에 달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작년 말 정보보호진흥원이 인터넷 이용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12%가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 9월 청소년 인터넷 이용자 273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0.9%가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나 아이디(ID)를 도용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보보호진흥원 조사에서 특이점은 인터넷 사업자들의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 관행이 주민등록번호 도용을 부추기는 가장 큰 이유로 꼽혔다는 점이다. 이용자들은 회원 가입시 가장 제공하기 꺼려하는 정보로 주민등록번호(응답자의 91.8%)를 꼽았다. 타인 번호 도용의 가장 큰 이유로는 '본인의 주민등록번호 유출이 두렵고 각종 사이트에 가입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를 들었다.

현재 국내 인터넷 사이트들의 대부분은 회원가입시 주민등록번호를 필수 정보로 요구하고 있다. 정보통신부가 올 8월 500개 인터넷 사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3%인 465개 사이트가 회원가입 조건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고 있었다. 작년 말 조사에서는 448개 사이트 중 447개가 그랬다.

인터넷 업계는 신규회원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도록 하지 않으면 불법게시물, 청소년유해물 등으로 인해 인터넷 공간이 크게 혼탁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않으면 커뮤니티, 이메일 등을 이용한 불법 행위가 크게 늘어나게 되고, 그러한 행위를 한 이용자를 제재하기도 어려워진다"며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성도 중요하지만 불법행위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상식을 거부하는 인터넷업체들 "주민등록번호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업계의 이러한 상식을 거스르는 업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도용으로 인한 개인정보침해 피해 사례가 크게 늘면서 자발적으로 회원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는 업체들이 생기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는 것.

인터넷 수능시험 강의사이트 '이비에스아이'(www.ebsi.co.kr)가 대표적이다. 지난 7월 이용자 260여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큰 물의를 일으킨 뒤 지난 9월초부터 신규회원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또 기존 회원들의 주민등록번호도 삭제했다. 이비에스아이에 가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름과 이메일 주소 등 회원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뿐이다. 지난 10월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인 비시파크(www.bcpak.net)도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않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다면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않는 이들 사이트에는 혹시 불법행위가 기승을 부리지 않았을까.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사이트 운영자들의 공통된 한마디는 "문제없음"이었다.

박병철 비씨파크 대표는 "사실 불법행위를 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이들은 대부분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한 사람들인데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본인확인을 하고 그것을 예방한다는 것은 넌센스"라며 "그러한 행위를 제재하는 방법은 인터넷 주소(IP)추적이라든지 기술적으로 여러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초기부터 회원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은 다음커뮤니케이션 관계자도 "업체들이 필요한 정보 외에 주민등록번호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개인정보수집이라고 본다"며 "불법게시물은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사전교육을 하거나 사후 모니터링을 통해 걸러내면 된다"고 말했다.

이들 업체들은 전자상거래라든지 성인인증 등 꼭 필요한 경우라면 그때마다 본인 확인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업체들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것은 특정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보유하고 있는 가입자 개인정보의 가치를 높이려는 데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외국에는 국내처럼 평생 바꿀 수 없는 개인식별 번호를 인터넷 회원 가입을 위해 입력을 요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전자상거래가 발달한 미국만 해도 인터넷 사이트 회원 등록이나 서비스 이용시 사회보장번호(SSN)를 요구하지 않는다.

외국에선 평생 따라다니는 식별번호 요구하지 않아

정연수 정보보진흥원 개인정보보호 팀장은 "미국의 야후, 아마존 등의 사이트에서는 사회보장번호나 다른 개인인식번호의 없이도 회원가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주문과 거래도 자유롭다"며 "국내 사업자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관행적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고 있어 번호도용을 부추기는 등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현재 정통부는 인터넷 사이트들의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금지시키기 위한 지침을 마련 중에 있다. 원래 올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계속 늦어지고 있다.

정통부 개인정보보호전담팀 관계자는 "현재 주민번호를 받지 않을 경우 부작용을 막을 대안을 놓고 관계 기관, 업체들과 협의 중에 있다"며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대신 필요한 경우에만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는 방법 등 대책을 올 안에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네트워크, 함께하는시민행동 등 시민단체들도 인터넷 업체들의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막기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지음씨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대상으로 주민등록번호 반환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며 "미국, 일본 등 외국의 사례처럼 우리도 민간 영역에서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식별번호의 수집과 이용을 법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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