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보기

79일째 단식 지율 스님


[인터뷰] 79일째 단식 지율 스님…절망을 딛고 ‘초록의 공명’을 울린다 (2005.1.11)

새해 들어 몇몇 언론들은 “지율 스님이 ‘신변정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외부와 연락도 아주 끊었다고 전했다. 80일 가까운 단식이라는 물리적 현실은 홑인용부호까지 붙은 ‘신변정리’의 기호에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읽어내게 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물어도 “연락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스님은 이 무심하고 야박한 세상에 마지막으로 무거운 부채의식을 안기고 그렇게 떠나려는 걸까.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조급함말고 달리 작정은 없었다. ‘천성산’ 홈페이지(www.cheonsung.com)에 스님 앞으로 편지를 썼다. 꼭 뵙고 싶노라고. 두어 시간 뒤 스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찾아와도 좋다고 했다. 그의 선선한 허락은 기자의 긴장을 무색하게 했다. 11일 오전, 스님이 머무는 청와대 근처 허름한 거처를 찾았다. 그를 곁에서 지키는 이는 속가의 여동생, 그리고 경찰이었다. 먼저 와 있던 종로경찰서장을 물리치고, 스님은 합장으로 기자를 맞았다.

스님은 손바닥만한 방 안에서 종이상자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더는 야윌 게 남지 않은 가냘픈 육신을 끝이 다 해진 적삼이 감싸고 있었다. 단식 77일째의 가부좌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빈틈이 없었다. 미소는 옅어서 평화로워 보였다. 경찰의 관심사와 기자의 관심사는 다르지 않았다. 스님은 얼마를 더 살까. 아니면, 언제 단식을 풀까. 어느 경우든 문제는 ‘디데이’였다. 그러나 그 말을 차마 꺼낼 수는 없었다. 에둘러, 얼마전 나온 기사 얘기를 꺼냈다.



“신변정리? 천성산 지키겠다 나섰을 때부터 했던 것”

“신변정리요? ” 스님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더니 천성산 싸움을 처음 시작했던 2001년으로 돌아갔다. “신변정리는 이미 그때부터 했지요. 미행과 협박, 온갖 일을 다 겪었거든요. 그땐 누가 절 지켜준 것도 아니었고, 항상 마음으로, 믿음으로 (신변을) 정리해야 했어요. ” 그 신변정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거였다. “지금 인터뷰하는 것도 이를테면 신변정리”라고도 했다. 적어도 스님의 방식이 ‘목숨을 거는 것’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10월27일 시작한 네 번째 단식은 이전 세 번의 단식과 많이 달랐다. 11월29일 부산고법의 ‘도롱뇽 소송’ 항고심에서 패소한 뒤, 천성산을 지키겠다던 사람들도, 단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들과 단체들은 대놓고 패배를 인정하기보다 천성산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렇지 못한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아 허기를 견뎌내며, 심지만 남은 촛불처럼 생명을 사르고 있다.

“제가 하는 일은 우물가의 수다라고 생각해요. 제가 원래 수다쟁이라. 호호호.” 스님에게도 변화는 있었다. 세 번째 58일 단식 때 청와대 앞에서 ‘묵언수행’했던 스님은 이제 자신의 일을 스스로 ‘수다’라고 규정했다. “이 세상 어머니들이 우물가나 빨래터에서 하시듯 그렇게 수다를 늘어놓고 있는 거예요. 수다는 그 자체로 수다스럽지만, 자기정화도 있거든요. 그런데 전 그렇게도 못한 것 같아요. 세상을 맑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 사회의 부조리를 대하다 보니까….” 기자 앞에서 늘어놓는 스님의 수다는 힘겨워 보였다. 목소리는 겨우 울대를 넘어 작고 낮게 새어나왔다.



“내가 하는 일은 우물가의 수다…겁도 많고 눈물도 많아”

스님 말대로 스님의 그것이 수다라면, 세상은 그 수다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스님은 “어제도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고 말하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밝은 얘기’로 말을 돌릴 뿐이었다. 스님이 끝내 밝히지 않은 ‘어제의 일’은 보도를 통해 비로소 확인됐다. 환경부는 천성산 터널 공사 재개 뒤 환경영향평가 이행을 감시할 민관 합동 특별점검팀을 꾸리면서 스님과 천성산대책위를 배제했다. 스님이 입을 다문 건 정부를 향한 분노를 수다로 풀어낼 정화작업을 채 마치지 못한 탓일까.

“제가 특별한 존재여서 천성산 살리기 운동을 시작한 게 아니어요.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절 전태일과 비교했던데,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정도예요. 사람들은 절 보고 무척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제 내면은 겁도 많고 눈물도 많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이 제대로 알려졌어야 했는데….”

그렇게 스님은 한사코 자신을 낮췄다. 자신에 대한 비난보다 과장된 미사여구가 더 싫을 때도 있다고 했다. 하기야 스님이 닮아버렸는지, 처음부터 닮은 꼴이었는지 알 수 없는 도롱뇽도 더없이 연약하고 투명한 생명체다. 하지만 천성산을 지켜내겠다는 우뚝한 목소리들이 무너져 내렸어도, 스님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연약하고 투명한 것들은 사소한 위협에도 쉽게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지만, 목숨을 던져 끝내 살 곳을 찾아간다.

“천성산 꼭대기에 가면 스물두 개의 늪지가 있는데, 함부로 발을 못 딛을 정도로 많은 생명들이 모여 살고 있어요. 도롱뇽은 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어요. 그 여린 생명들이 그 곳으로 모여든 건 그 곳이 그나마 그들이 살 수 있는 피난처 같은 곳이기 때문이죠.”



“다들 끝난 싸움이라며 떠났다. 난 그 끝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생명들이 산 위로 산 위로 터전을 옮길 땐 절체절명의 위기도 많았을 터이다. 스님에게도 부산고법의 판결이 나온 직후의 상황이 꼭 그와 같았다고 했다. “사법부만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거라고, 마지막 의지처로 여겼는데… 절망에 빠졌어요. 단식 80일이 다 된 지금보다 오히려 그 때 몸 상태가 훨씬 나빴습니다.” 재판부는 법정에서 스님과 고속철도공단 쪽에 양쪽 전문가의 공동조사를 받아들인다는 서약을 하도록 해놓고, 환경부의 일방적인 독자 검토 결과를 받아들여 지난해 11월27일 소송을 기각했다.

“40만 명의 도롱뇽 친구들과 함께 했고 전국의 종교인들이 거리로 나왔는데,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한다는 수많은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20편 넘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수천 건의 기사로 다뤄진 천성산의 ‘생명의 가치’가 법원 판결 하나로 하루 아침에 ‘경제의 가치’로 돌아서 버렸어요. 단체들도 이미 끝난 싸움이라며 떠났는데, 전 그 끝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남았지요.”

혼자 남은 스님의 거처는 비좁고, 거처로 가는 골목은 깊다. 스님에게 그 곳은 자신을 스스로 유폐한 닫힌 공간일까, 아니면 마지막으로 생명을 기댈 또 하나의 천성산 꼭대기의 늪지일까. 스님에게도 처음엔 작정이 없었다. 끝은 어딜까. 끝을 내려면 뭘 할 수 있을까. 스님은 자신과 전국의 유치원생부터 할머니들까지 한 땀 한 땀 놓은 2천 장의 도롱뇽 수와 5천 통의 편지, 천성산을 400번 오르내리며 직접 찍은 천성산 생태사진을 떠올렸다고 했다.



단식하며 하루 20시간씩 자료 정리…영상 시디로 완성

“그걸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정리해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 같은 교육자료로 만들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천성산 문제를 사회 현안이 아니라 교육의 현안으로 이어가자는 거였습니다.” 스님은 “자료를 정리하면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뭐였는지 새삼 알게 됐다”고 했다. 하루 스무 시간씩 컴퓨터에 매달리며 이 자료가 우리 자연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마음도 평안하게 정화되고 육체의 한계도 극복해 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영상물 시디 <초록의 공명>이다. “제 자랑하는 거예요.” 스님은 기자에게 <초록의 공명>에 담긴 영상물을 하나 하나 열어 보여줬다. 스님은 그 많은 영상물 자료들은 그저 우연히 찍은 거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씩 다듬다 보니 완결적인 이야기가 되더라고 했다. <초록의 공명>은 사진과 배경음악, 서사구조의 빼어난 완성도만으로도 자랑할 만했다. 하지만 스님의 자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명 현상’이었다.

공명이라 이름붙인 뜻이 뭐냐는 물음에 스님은 “직접 손이 닿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명”이라고 했다. 스님이 만든 <초록의 공명>은 전교조와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모임, 인터넷을 통해 공명을 일으키며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스님은 100만 명이 손을 맞잡았고, 다시 그게 공명을 일으켜 퍼져나가는데 어떻게 끝난 싸움이 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스님은 기자에게도 여러 장의 시디를 건네며 “공명해 주세요”라고 당부했다.



“단식은 수많은 방식 중 하나…죽음의 공포 벗어나”

기자는 시디를 받으며, 공명을 하려면 극단적인 단식투쟁은 접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님은 대답했다.

“단식은 내가 유일하게 선택한 방식이 아닙니다. 전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다 선택했습니다. 국토 도보순례와 자전거순례, 거리특강과 서명, 삼천배…. 공사현장에서 100일 동안 가시철망에 몸이 찢겨가며 인부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자식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막대기도 내밀고 치마폭도 풀어 내밀어야지, 집에 있는 고무보트를 떠올릴 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단식은 내가 해본 방식 가운데 그나마 덜 극단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전 스님을 찾은 한 한의사는 “스님의 몸은 이미 이승을 떠났다”고 말했다. 스님은 “내겐 수호천사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답해줬다고 했다. “천성산은 제 여동생 같은 산이어요. 제 여동생은 제가 업어 키웠거든요. 그런데 지금 그 여동생이 제 곁을 지켜주고 있어요. 천성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천성산이 절 가르치고 키웠어요. 앞으로도 천성산이 절 지켜줄 겁니다.” 스님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있다고 했다.

스님은 자신에게도 늘 애와 증이 함께 있었다고 했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는 희로애락이 없다고 했다. 마음 깊은 곳에 그런 게 있었다면 이미 심장이 터져 죽었을 거라고 했다. “부모가 자식을 안아줄 때도 있고 때려줄 때도 있지만 자식을 향한 마음의 뿌리는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지요. 상황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스님은 “대통령과 정부, 사법부가 약속을 어기면 분노의 눈물이 나지만, 그 눈물은 그들의 업을 제가 함께 안고 가야 할 동업의 무게로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답은 우리 안에 있어요. 다 같이 답을 찾아가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마지막으로 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스님은 대뜸 기자에게 되물었다.
“기자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답은 기자님 안에 있어요. 제가 어떻게 하겠다는 건 답이 아니어요. 다 같이 그 답을 찾아가야 하는 거지요. 그걸 화두로 붙들고 말이어요.”

지난해 11월 말부터 천성산에는 다시 중장비의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대법원이 부산고법의 판결을 뒤집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대로라면 천성산의 수많은 단층대와 늪지와 계곡과 폭포의 아래를 뚫거나 잘라가며 ‘꿈의 고속철’은 달리게 될 것이다. 천성산에 깃들여 사는 여리고 투명한 생명들도 속도와 이윤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다 하나 하나 사라져갈 운명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스님이 먼저 화두를 내려놓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합장하고 돌아서는 순간 예감으로 스쳤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 지율스님을 살려주세요 서명하기
 
* 경남 양산 천성산 홈페이지
 
* 천성산 살리기 도롱뇽 소송 100만인 서명운동에 서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