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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켜지면 '느린 삶' 보인다

캔들족을 아시나요… 촛불이 켜지면 '느린 삶' 보인다

TV·컴퓨터·휴대폰 Off, 책 읽기·가족과 대화 On
이산화탄소 줄이기 등 생활 속에서 친환경 실천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단 하룻밤이라도 전등 대신 촛불을 켜고 지내본 적이 있는지. 촛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일기를 쓰며 ‘느린 삶’의 즐거움에 푹 빠져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은 캔들(candle)족, 슬로(slow)족임에 틀림없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느리게 살자’는 움직임이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 캔들족이 그 대표적인 경우. 지난 5월 ‘캔들 나이트 인 코리아’ 등 크고 작은 모임들을 만들기 시작한 젊은이들은 21일 밤 ‘캔들 나이트’라는 이름의 첫 축제를 가졌다. 밤 8시부터 2시간 동안 집안의 모든 전등을 끄고 촛불만 켠 채 생활하는 것. 그중 30여명은 이 행사를 위해 2시간 동안 조명을 꺼준 세종문화회관의 계단에 모여 작은 촛불 음악회를 가졌다.

압구정동 한 유기농 레스토랑에서도 캔들 나이트가 진행됐다. “이날만큼은 카페를 찾은 모든 손님들이 촛불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눴어요. 그리고 다짐하는 거죠. 한 달에 단 하룻밤이라도 전등과 TV를 끄고 이렇듯 낭만적이고 친환경적인 밤을 보내야겠다, 고요.”

김주은(연세대 공학부 1년), 신정화(이화여대 사회과학부 1년), 미야자와 아키(이화여대 국문과 2년), 김유카(연세대 국제교육교류원 2년)도 스스로 캔들족으로 자처하는 젊은이들. 얼마 전 ‘슬로우 라이프’(디자인하우스)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일본 환경주의자 쓰지 신이치의 서울 강연회에 갔다가 만난 이들은 느리게 사는 삶의 다양한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캔들 나이트’ 행사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일본에서 유학온 아키씨다. “2001년부터 일본 전역에서는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환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100만인 캔들 나이트 운동’이 펼쳐집니다. 그날 저녁만큼은 촛불의 빛으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고요한 식사를 해요. TV와 컴퓨터, 휴대폰에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고 나와 가족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지요.”

촛불 켜기뿐 아니다. 청일점 주은씨는 밥을 천천히 남김없이 먹기로 유명하다. 최소 30분에서 1시간.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혹은 책을 읽으면서 천천히 먹어요. 소화도 잘 되고, 소식을 하게 되니 살도 안 찌지요.” 고향이 천안인 정화씨는 “집밖 음식은 안전하지 않다”는 신념으로 텃밭에서 직접 온갖 야채를 길러먹는 부모님 덕분에 일찌감치 슬로족이 된 경우. “이산화탄소 줄이는 법 알려드릴까요? 3㎞ 이동할 때 택시 대신 지하철을 타면 이산화탄소가 1200g 줄어든데요. 사용하지 않는 에어컨 전원을 끄면 또 20g 줄고, 목욕물로 세탁하면 50g, 샤워를 1분 단축하면 60g의 이산화탄소가 줄어듭니다.”

환경정책을 공부하고 있는 재일교포 유카씨는 음식을 통해 느린 삶을 실천한다.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 제품에는 손도 안 댄다. 직접 요리를 하고, 식재료를 살 때 원산지와 식품첨가물을 반드시 확인한다. “다 가공된 음식을 아무 생각없이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 야채 한포기를 수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는지 음미하는 것이 ‘무엇을 먹는다’는 것의 진정한 행복이니까요.”

“미련곰퉁이” 소리를 들어도 슬로 라이프의 행복에서 빠져나오기 싫다는 이들은 “느리게 사는 삶이야말로 환경문제로 위기에 처한 지구를 위해 인류가 할 수 있는 길”이라며 당당했다. “이런 동화 들어보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꿀벌새가 숲에 불이 나자 그 작은 입으로 한모금씩 물을 나릅니다. 그러자 숲속 동물들이 비웃었지요. 그렇게 해서 불이 꺼지겠느냐고요. 하지만 꿀벌새는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뿐이야, 라고요.”


(김윤덕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si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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