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보기

부부 사이 작은 다툼의 추억들

부부 사이 작은 다툼의 추억들
[오마이뉴스 김동원 기자] 싸움이 심각하면 서로에게 상처로 남지만, 때로 가벼운 다툼은 즐거운 추억이 되기도 한다. 집안을 둘러보면 이런저런 것들이 그녀와 나의 사이에 있었던 가벼운 다툼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2005 김동원
김이다. 정확히 그녀와의 첫 다툼은 김이 아니라 김밥과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 둘은 누구나 살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나나 그녀 모두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자랐지 한 번도 스스로 밥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가 어느 날 오늘은 김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서툴렀으랴. 물끄러미 김밥 마는 것을 내려다보던 나는 무심히 한마디 했다.

“아예, 떡을 쳐라, 떡을 쳐.”

갑자기 그녀가 김밥 말던 손길을 멈추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녀는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하여 김밥을 말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러니까 그냥 김밥을 말았던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를 위하여 김밥을 말았던 것이며, 그 누군가가 바로 나였다. 그래서 내 얘기는 그것이 아무리 그녀의 김밥에 대한 공정한 비평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공정성을 가질 수 없었으며,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무지막지한 배신 행위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상당히 미안했다.

혹 그녀가 말아준 김밥이 떡인지 김밥인지 헷갈리더라도 나처럼 김밥 자체에 눈을 빼앗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지어다. 그 어리석음은 사랑을 배신당한 한 여자가 주체 못하고 쏟아내는 눈물의 씨앗이 되나니.

ⓒ2005 김동원
내 책상 위의 풍경이다. 컵은 벌써 이틀째 그 자리에서 먹다 남은 음료의 말라붙은 자국과 함께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결혼 초에도 내 책상 위의 풍경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심 때 먹은 밥그릇이 저녁 때 퇴근한 그녀가 치워줄 때까지 그대로 제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는 드디어 그 그릇들 좀 치우면 안 되냐고 잔소리를 했다.

나름대로 바쁘자고 하면 얼마든지 바쁠 수 있는 프리랜서였던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언성을 높였다간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뒤 조용히 "너, 발견예술이라고 들어봤냐"라고 물었다.

그녀: 그게 뭔데?
나: 아, 그 왜 변기를 가져다 전시해 놓고 '샘물'이라고 제목을 붙이거나 홍수에 떠내려가는 나무를 건져다 전시해놓고 '비행중'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예술 있잖아. 그런 것을 발견예술이라고 해.
그녀: 그런데.
나: 니 눈엔 이게 내가 게을러서 책상을 어지럽혀 놓은 걸로 보이냐.
그녀: 아니, 또 무슨 궤변이야. 그럼 이게 예술이란 말이야.
나: 궤변이라니. 이건 제목까지 있어!
그녀: 제목? 퍽도 있겠다. 그래 제목이 뭔데?
나: <기옥 손길을 기다리며>


기옥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씩씩대며 나를 노려볼 뿐 그 다음 대꾸는 잇지 못했다. 좀 우당탕 거리기는 했지만 그날 설거지도 또 그녀가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내 책상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견예술의 전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전시 시간이 만료되었다 싶으면 그녀가 작품들을 치워주었다.

ⓒ2005 김동원
빨래다.
결혼 초에 우리는 가사를 둘로 나누어 각각 분담했다. 나는 빨래를 맡았고 그녀는 식사를 맡았다. 내가 빨래를 맡은 것은 당시엔 세탁기가 없어서 빨래란 것이 순전히 힘을 필요로 하는 남자의 노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말다툼이 일면 그 불똥이 서로가 맡은 일로 번져 나갔고 그때면 절대적으로 내가 유리했다. 나는 이렇게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야, 너 내가 빨래 안 해줘서 발가벗고 다닌 적 있냐? 나는 니가 밥 안 해줘서 굶은 적 있어, 이거 왜 이래.”

ⓒ2005 김동원

내 책꽂이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내 책꽂이를 쳐다보다 트집을 잡았다.

동원이형, 책은 읽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계속 사들이는 거야? (그녀와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를 가리켜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 습관은 우리의 결혼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 그건 내가 책을 읽지 않는 게 아니고 단지 속도의 차이에 의한 착시 현상일 뿐이야.
그녀: 뭐, 착시 현상?
나: 그래. 책을 사는 속도와 책을 읽는 속도의 근본적 차이에서 오는 착시 현상이지. 돈만 있으면 책을 사는 속도가 훨씬 빠를 수밖에 없어. 그래서 요즘은 책을 사는 속도가 빠른 것뿐이지 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야. 다만 그 속도의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마치 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처럼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것뿐이야. 이제 알아듣겠어.


ⓒ2005 김동원

장롱의 틈새다.
나에겐 좀 지저분한 버릇이 있는데 그건 얼굴의 숨구멍에서 분비되는 분비물을 말똥구리처럼 돌돌 말아서 장롱의 옆으로 나 있는 틈새로 정확히 튕겨 보내는 습관이었다. 물론 그녀가 나의 이 습관을 그냥 용인했을 리 없다. 그녀는 딸을 하나 낳은 뒤, 어쩌면 지저분한 버릇도 지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냐며 자신이 나의 이 습관에 관한 한 애를 낳고 나서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음을 한탄한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어느 날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녀: 야, 그거 계속 그리로 집어넣을래!”
“나: 그럼 이 지저분한 것을 방 한가운데 놔두냐?”

예상외의 일격에 갑자기 할 말은 잃은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2005 김동원
어느 날은 그녀가 내가 보는 책을 문제 삼았다.

그녀: 동원이형, 정말 그 영어책 다 알고 보는 거야?
나: 사실 거의 몰라.
그녀: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 봐.
나: 나만의 즐거움이 있거든.
그녀: 모른다면서.
나: 어, 아는 단어 찾는 즐거움. 50페이지마다 아는 단어가 하나씩 나와. 얼마나 반가운데.


/김동원 기자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인 http://blog.kdongwon.com/index.php?pl=109에 함께 실려있습니다.


- ⓒ 2005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