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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의 하향 평준화, 나는 분노한다

김밥의 하향 평준화, 나는 분노한다
[오마이뉴스 이갑순 기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는 이 말을 가져다 붙여 볼까.

나는 김밥을 참 좋아한다. 한국 사람들치고 김밥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겠지만, 바쁜 출근길 샌드위치보다도, 토스트보다도 나는 김밥 한 줄이 더 좋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 안에 퍼지는 그 짭짤하기도 하고 새콤하기도 하고, 아삭거리기도 하고 녹아들기도 하는 그 맛이 너무너무 좋다. 김밥 한 줄만 있어도 서로서로 나눠 먹을 수 있어 생색 내기에도 좋고, 5줄쯤 남았다 해도 먹다 보면 없어져 버리는 게 김밥이니, 버릴 것 없는 그 깔끔함도 맘에 든다.

그렇게 좋아하는 김밥이지만, 김밥은 어릴 적 나에겐 소풍이나 운동회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그런 음식이었다. 소풍날 아침 엄마가 김밥을 말 때, 그 옆에 붙어 앉아 '꼬다리'를 주워 먹는 그 맛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 년에 고작 세 번밖에 먹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한 방에 날려 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김밥 전문점들의 등장이었다. 김밥집 창문 바로 너머 돌돌돌 말려 쌓여 있는 그 김밥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흐뭇한 미소를 흘렸는가. 거기다 김밥 종류까지 다양하니, 기쁨은 두 배였다. 참치 김밥, 쇠고기 김밥, 치즈 김밥 등등.

아마 김밥 전문점들의 등장은 내게 있어서 '음식 혁명'이라고 불러도 될 듯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돈 없는 어린 학생에겐 한 줄에 삼천 원에 가까운 김밥은 상당히 부담스런 가격이었다. 적어도 김밥을 먹었구나, 말하려면 두 줄은 먹어야 했는데, 오천 원이 훌쩍 뛰어 버리는 그 돈이 너무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결국 김밥은 소풍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제자리를 찾아가 버렸다.

▲ 어디서나 김밥 천 원.
ⓒ2005 이갑순
그런데 김밥에 관한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바로 천 원 김밥집의 등장이었다. 천 원짜리 김밥이라니. 천 원짜리 한 장만 있으면 김밥을 먹을 수 있다니, 그건 내게 축복이었다. 이후 나는 천 원짜리 김밥들을 엄청 먹어댔다. 이 집 저 집 크기도 비교하고 재료들까지 비교해 보면서 어지간히도 먹었다. 더불어 그전 2500원짜리 김밥들이 얼마나 폭리를 취했을까, 생각하면서 혼자 흥분하기도 했다.

이제 대세는 천 원짜리 김밥으로 기울었다. 2500원 김밥들이 설 자리들을 잃어 가자, 결국 고가의 김밥 전문점들도 천 원짜리 김밥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걸 '김밥의 하향 평준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느날, 천 원짜리 김밥의 대다수가 원가를 낮추기 위해 중국산 찐쌀로 만들어졌다는 정말 입 벌어지는 기사를 읽어 버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자 나의 김밥 인생에 다시 먹구름이 낀 것이다. 평소 농사 짓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이왕이면 밥을 먹고, 이왕이면 국산을 쓰려고 애썼는데, 내가 먹는 김밥이 중국산 쌀에다 더하여 찐쌀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향 평준화되어 버린 김밥이다. 이젠 국산 쌀을 썼을 거라 믿어지는 몇 년 전의 그 비싼 김밥을 사 먹으려고 해도, 그 쌀만 중국산 찐쌀이 아닐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싼 김밥에 들어가는 쌀 따로, 비싼 김밥에 들어가는 쌀 따로, 그렇게 밥 지을 김밥집이 어디에 있겠냐 말이다. 그래서 이젠 비싼 김밥까지도 사 먹을 수 없는 불상사가 생겨 버린 것이다.

▲ 두 줄이면 이천 원.
ⓒ2005 이갑순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버린 것이다. 싼 것만 찾아대다가 결국 스스로 수렁으로 걸어 들어간 꼴이 된 셈이다. 하향 평준화되어 버린 김밥, '나는 이제 천 원 김밥은 절대 안 먹고, 집에서 보내준 쌀로 직접 김밥 말아서 더 맛나게 먹어야지'라고 이 글을 끝내기엔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제발 음식을, 믿고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이갑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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