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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만' 아닌 '우리 아이들' 키워요"

 
"'내 아이만' 아닌 '우리 아이들' 키워요"

[소비하지 않아도 잘살 수 있다] 맞벌이 부부들의 품앗이 육아
"육아도 품앗이로 하니 아이가 불안하지 않아요"

미디어다음 / 심규진 기자



소비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







해맑은 공기와 어우러진 산세가 평화로운 서울의 끝자락 우이동 골목에 자리잡은 이층짜리 단독주택. ‘꿈꾸는 어린이집’이란 작은 간판이 붙어있다.

대문을 열자마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화분들과 너른 마당에 심어놓은 텃밭 채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방에는 아이들에게 먹일 친환경 먹을거리가 쌓여있고 각 방에서는 아이들이 교사들과 함께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는 보통 놀이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TV와 플라스틱 놀이기구가 없다. 대신 아이들은 텃밭 농사를 짓고, 물장난, 모래장난을 하며 영어단어 대신 꽃과 풀, 벌레의 이름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거나, 숫자공부, 영어공부 같은 외우기 학습을 강요받지 않는다. 이곳은 부모들이 직접 세워서 운영하는 공동육아방이다.
"우리 아이에서 이웃의 아이로"
"아이가 하루종일 무엇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으니 불안하지 않아요"



생태체험 [사진출처=우이동꿈꾸는어린이집]

“공동육아방에 보내고 가장 달라진 점은 아이들의 생활과 가까워졌다는 거죠. 아이의 육아를 그저 돈을 주고 놀이방에 맡기기만 하면, 우리 아이가 하루종일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전혀 알 수가 없잖아요.” (36, 황준영. 직장인)

세 살 된 쌍둥이 아들 석주, 석준이를 공동육아방에 보내고 있는 황준영씨 부부. 부부가 모두 바쁜 금융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두 아이의 육아는 그 동안 집근처 놀이방에 의존해왔다. 그런데 아이들은 놀이방에 아이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놀이방은 낮 시간동안 부모들의 출입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불안함에 떨던 황씨 부부는 지난 해부터 집 근처 놀이방 대신 마포에 위치한 공동육아방 ‘우리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다. 부부는 “부모들이 직접 운영에 참여하니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훤히 알 수 있어 공동육아방에 보낸 후로는 아이에 대한 불안감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한다.

‘공동육아’는 학부모들이 일정액을 출자해 협동조합을 세운 후 직접 놀이방을 운영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같은 육아 방식은 애초 ‘품앗이 공동육아’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말 그대로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던 전업주부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교사가 돼 서로의 아이를 가르치고 돌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육아 공동체에 대한 참여와 책임’이라는 철학에 공감하면서도 시간을 내기 힘든 맞벌이 부부들이 모여 만든 것이 ‘공동육아방’이다. 부모들이 출자해 고용한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맡긴다는 것이 ‘품앗이 공동육아방’과 다른 점이지만, ‘품앗이’ 정신은 고스란히 녹아있다. 직장일로 바쁘거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부모들은 돌아가면서 아이를 놀이방에 데려다 주고, 이웃에 급한 사정이 생겼을 때는 며칠 동안 아이를 맡아주기도 한다.

아들 태규(4)를 마포 공동육아방에 보내고 있는 김세미(40, 직장인)씨는 “태규의 친구인 하늘이네 부모님이 사정이 있어 며칠간 집을 비웠을 때 하늘이를 우리 집에서 재웠다”며 “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의지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게 든든하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또 교사의 휴가일에 돌아가면서 일일교사를 하거나, 청소당번, 나들이 차량 당번 등을 맡는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기회가 많으니 ‘우리 아이가 잘 적응하는지,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일이 없다. 내 아이 뿐 아니라 아이의 친구들, 이웃 아이들의 성격이며 집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지낸다.
교사와 학부모, 아이들이 가족처럼


구경자씨는 "아이가 공동육아방에 다닌 후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고 말한다. ⓒ미디어다음

낮잠에서 깨어난 난 아이가 교사에게 “길동이(선생님의 애칭), 나 배고파”라고 투정을 부린다. 마치 이모를 대하듯 스스럼없는 태도다. 공동육아방에는 반말과 애칭, 날적이 등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교사들은 아무개 선생님이 아닌 길동이, 기린 등 각자의 별명으로 아이들에게 불리고, 부모들은 ‘아마’라고 불린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친구처럼 반말을 쓴다. 교육적 효과에 대해 다소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반말 문화는 교사와 아이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위한 것이다.

날적이는 선생님과 학부모 간의 교환 일기다. 교사들이 아이들의 놀이방 생활을 일기처럼 적어보내면 부모들도 집에서 벌어지는 아이의 생활을 적어 보낸다. 부모와 교사가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가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키우는 교육


아이들이 직접 만든 마당의 화분들. 공동육아방에서는 인지교육보다 생태, 환경 교육에 힘쓴다. ⓒ미디어다음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지 않고 모두가 인격체로서 평등한 관계를 맺습니다. 글자공부 영어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아이는 칭찬받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관심받고 사랑받아야 할 주인공이 되는 것이죠.”

7살 난 첫째 아이 윤서를 서울시 우이동 꿈꾸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구경자(35, 교사)씨는 “공동육아방을 다닌 후 아이가 모든 면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했다. 재미있는 TV 만화를 보여달라고 떼를 쓰던 아이는 요즘은 도토리를 주우러 나들이를 가자고 조른다. 공동육아방은 학습지를 이용한 인지교육 대신 생태교육, 환경교육, 공동체 교육을 한다.

공동육아방은 교사 한 명이 돌보는 아이의 수가 2~3세는 4명, 4~6세는 8~10명, 7세는 12명으로 정해져 있다. 일반 놀이방보다 훨씬 적다. 때문에 부모들이 부담해야 할 액수도 만만치 않다.

우이동 어린이집의 경우 아이 한 명당 50만원 내외의 조합운영비를 부담한다. 처음 가입할 때 내는 출자금 500만원은 놀이방의 전세금으로 쓰이고, 놀이방을 졸업할 때 되돌려받는다. 구씨는 “그래서 ‘공동육아’하면 돈 많은 맞벌이부부들이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실제는 평균 이하의 소득 가정들이 대부분이다”고 귀띔한다. 공동 육아의 철학에 공감해 참여하는 것이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얘기다.

우이동 공동육아방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심화란씨는 운영비 부담에 대해 “수십만원씩 들여서 영어유치원이나 학습지를 시키는 것에 비하면 비싸지 않다. 특정한 개인이 운영비를 거둬서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학습지나 영어유치원을 포기하는 대신,우리 지역의 아이들에게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운영비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배우느냐. 경쟁이 아닌 공동체


학부모와 교사의 교환일기인 '날적이'는 공동육아방의 독특한 문화다. ⓒ미디어다음

공동육아조합의 운영진은 교사와 학부모인 ‘아마’들이다. 아이들 먹을거리며 교육 프로그램까지 부모들 스스로 결정하고 참여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민주적’인 운영방식 때문에 의사결정이 더디고 효율적이지 못할 때도 많다. 또 학부모들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다양하다보니 교육 방식에 대한 이견을 보일 때도 있다. 마포 우리어린이집 교사 홍순영씨는 “부모나 교사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동육아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또 일반 놀이방에 비해 운영비도 더 많이 들어가고, 차량부터 청소까지 부모가 직접 참여하고 부담해야 할 부분이 많다보니 육체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더 힘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공동육아의 정신을 이어나가려는 학부모들의 동참은 계속 늘어나 현재 전국적으로 공동어린이집 60 곳이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 교육의 회원으로 속해있다. 공동육아의 교육철학은 아이들의 취학 후에도 방과 후 교육이나 대안 학교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이동 꿈꾸는 어린이집 교사 기린(애칭)씨는 “내가 바쁠 때 도움을 받고, 또 남이 힘들 때는 도울 수 있는 육아 방법, ‘내 아이만’이 아닌 ‘이웃의 아이도’의 개념이 실현되는 곳이 공동 육아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