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보기

“돈독이 올랐다고?” 대추리 노인들‘피멍’

 

[현장]“돈독이 올랐다고?” 대추리 노인들‘피멍’



[한겨레] “다른 동네 논에서 벼가 크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지난 8일 경기 평택시 대추리 노인정 앞에서 만난 농민 이수궐(70)씨는 한숨만 내쉬었다. 아침 저녁으로 논 일을 하던 그는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다. 2∼3중의 철조망과 거대한 수로, 군 초소 등에 그의 논이 갇혔기 때문이다.

자식과 같은 흙과 벼를 빼앗긴 대추리 농민들에게 ‘희망’은 있는 것일까. 이씨와 같은 또래 노인들은 벌건 대낮부터 오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켰다. 이씨는 “아침이면 벌판이 군 훈련장 같다”고 말했다. 곤봉을 멘 병사들이 시위진압 훈련을 하고 아침마다 울리는 애국가와 나팔 소리에 주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했다.

지난달 4일 군·경 병력이 투입된 뒤 이들에 둘러싸인 채 점차 고립된 ‘섬’이 되어버린 대추리의 노인들한테서 3년간의 긴 싸움 끝에 쌓인 피로감이 묻어났다. 이달말까지 집을 비우라는 퇴거장도 날아왔지만 ‘악’만 남은 노인들은 “와서 부숴보라고 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을 상대로 한 정부의 공세는 그동안 효과를 본 듯했다. “반대 주민 중 10억원 이상 보상을 받은 ‘백만장자’가 21명인데도 생존권 박탈이라는 것은 모순”이라는 공세와 “외부 불순단체에 주민들이 휘둘린다”는 이념 공세에, 대규모 공권력까지 동원됐다. 그러나 노인이 다수인 주민들은 밀려드는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가슴에 ‘피멍’만 들었다.

정태화(71) 노인회장은 “내 땅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시내에 가서 ‘대추리 늙은이들이 돈독이 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주민 이정오(70)씨는 “정부는 70%에 이르는 외지인 땅을 수용해놓고 땅 수용이 잘 됐다고 자랑하는데, 진짜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용을 거부했다”며 “정부는 그런데도 극렬한 농민들 30여가구 정도가 반대하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고 이를 언론이 받아쓰는 것에 더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11일까지 토지수용을 거부한 가구수는 98가구. 대추리 162가구 중 66가구, 도두리 80가구 중 32가구가 ‘시퍼렇게’ 남아있다. 남은 농민들이 분노를 삭이는 와중에서도, 논밭이라도 있는 일부 농민들과 달리 거의 빈손으로 내쫓길 처지의 ‘영세농’들의 시름은 더욱 커 보인다.

시집 와 43년을 대추리에서 살아온 서삼파(66·여)씨는 논도 밭도 없이 달랑 하나 있는 집 한 채에 2500만원이라는 감정평가를 받았다. 서씨는 “경비원 일을 하는 남편이 그나마 70살이 넘어 다음달이면 그만둔다”며 “5천만원도 안되는 보상금을 받고 늙은이들이 어디 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 그냥 이곳에 있다가 집을 부수면 깔려 죽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대추리 지장물 조사를 나온 한국토지공사 직원들은 “서씨 같이 집 한 채만 있고 논이나 밭이 없는 경우가 대추리에 17가구에 이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5월 초 국방부 발표를 보면, 대추·도두리 반대 주민 105가구 중 1억원 미만의 보상금을 받는 사람은 18가구, 2억원 미만이 22가구, 3억원 미만 보상금을 받는 주민은 9가구 등으로, 절반에 가까운 49가구의 보상금이 3억원 미만이다.

논 1천평에 집 한 채를 지닌 최진례(64·여)씨는 “척추를 다친 아들 대신 손자·손녀 2명을 키우고 미혼인 딸 2명을 데리고 사는데 어린 것들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농민을 위한다기에 지난 선거에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내가 찍었어. 그런데 이제와 이게 뭐야”라는 그의 말에선 깊은 배신감이 묻어나왔다. 평택/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기사제공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