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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의 행복한 이혼

 

이보다 더 행복한 이혼은 없다




[한겨레] 환상에 젖어 자동차와 결혼한 뒤 평생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대인들…자신의 차와 결별한 뒤 건강과 연대의 삶을 얻은 이들의 화려한 인생역전기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누군가 묻는다. “어떻게 다녀요?” 그는 대답한다. “베엠베 타요.” 그러면 또다시 묻는다. “어떤 베엠베 타고 다니세요?” 그는 웃는다.

박영숙(74)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베엠베(BMW)를 타고 다닌다. 그는 경기 일산의 집에서 서울 서교동의 여성재단 사무실까지 마을버스(Bus)를 타고 나와서 지하철(Metro)로 갈아타고, 걸어서(Walking) 도착한다. 가끔씩 땀도 날 만큼 적잖이 걷는다. 그러니까 그의 베엠베는 2억원짜리가 아니라 2천원짜리다. 그가 이렇게 베엠베를 설명하면 다른 이도 웃는다.

걸음의 미학, 불편이 건강을 만든다

박영숙 이사장은 국회의원까지 지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 조찬모임에 나갈 정도의 활동가이지만, 평생 자동차를 소유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한 번도 자동차와 ‘결혼’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자동차의 두 바퀴 대신 두 발로 걸어온 덕분에 지구의 건강을 덜 해치고, 자신의 건강을 지켰다. 그는 “요즘 오히려 젊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항상 걸어다닌 덕분”이라고 말했다. 불편이 쌓여서 건강을 만든 것이다.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돌베개)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쉽게 말해 개인이 소유한 자동차를 버리라는 이야기인데, 이혼의 전제는 결혼이니 당신이 자동차와 결혼을 했다는 뜻이 된다. 아뿔싸, 자동차와 결혼은 절묘한 비유다. 먼저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듯이 성인이 되면 자동차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다(자동차 권하는 사회). 자동차가 얼마나 아름다운 상대인지, 결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날마다 세뇌당한다(자동차와 결혼을 미화하는 광고와 보도). 그리하여 자동차가 가져다줄 자유에 환상을 품는다.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다가 미끈한 몸매와 단단한 근육질에 매료돼 결혼한다. 혼인신고를 하듯이 자동차등록증을 만든다. 애인을 대하듯 애지중지 자동차의 ‘기분’을 살피고 혹시나 ‘기스’가 나면 즉시 고친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애타듯, 하루라도 타지 않으면 허전하다. 그렇게 사랑의 포로가 되듯 자동차의 포로가 된다. 달콤한 신혼이 끝나면 문제가 생기듯, 자동차와 밀애가 끝나면 날마다 투덜거린다(“이놈의 고물 자동차!”). 하지만 쉽게 헤어지지는 못한다. 한국 아저씨들이 결혼하면 배가 나오듯 자동차에 중독되면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자동차에 중독된다. 덧붙여 자동차가 배우자보다 좋은 이유도 있다. 자동차와 이혼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다(“차를 바꿔야겠군”). 그리하여 한 번 자동차와 결혼한 사람은 평생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결혼생활을 지속한다.

용감하게도 자동차 의존 사회에서 자동차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중독된 사랑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다. 바로 성인이 되어 자동차와 만나 뒤늦게 헤어진 자동차 이혼자들이다. 박 이사장과 같은 ‘독신자’로 회귀하는 사람들이다.

“주위 선생님들에게 먼저 폭탄선언을 했어요. 차를 팔겠다고!” 충남 천안에서 사회 교사를 하는 유환성(41)씨는 10월20일 정말로 자동차를 팔았다. 무거워지는 몸, 2km도 채 안 되는 학교를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데 따른 ‘지구에 대한 미안함’, 사회 교사로서의 자격지심이 결국 실행에 옮기게 했다. 일단 이혼 선언을 한 뒤 자동차부터 팔고 봤다. 일주일이 지난 뒤 판 돈 100만원 중 30만원으로 자전거를 샀다. 그는 말한다. “차가 없어서 허전하고 불편하기보다는 후련해요.” 자동차를 잃은 대신에 양심을 얻은 것이다.

운전하고 여섯달 지나자 허리 고장

자동차 이혼의 선구자 격인 윤호섭(62)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도 “통쾌하다”고 말한다. 그는 2000년 자동차와의 별거에 들어간 뒤, 2003년 완전 이혼했다. 찻값도 받지 않고 소나타 골드를 폐차장에 넘겼다. “나라도 몹쓸 기계 한 대를 줄여야지요.” 일종의 자동차 ‘러다이트’ 운동을 실천한 셈이다. 윤 교수는 자동차 대신 버스와 자전거를 탔다. 그는 “교통체증 속에서 자전거로 달리면 문명의 체증을 뚫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문명은 양날의 칼이다. 자동차 문명은 진보하면서 퇴보했다. 1990년대에는 전세계 자동차 수가 사람 수보다 세 배 빨리 증가했다. 자동차 수는 1999년에 7억 대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한국의 자동차는 1540만 대. 3명 중 1명꼴로 자동차를 갖고 있고, 요즈음엔 매년 2~4% 늘어난다. 자동차 한 대당 하루 평균 주행 거리는 61.2km(2002년)로 미국(55.3km)보다 많다. 하지만 자동차 문명은 교통사고 사망자를 양산했다. 한국에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 동안 4만2120명이 도로 교통사고로 숨졌으며, 194만1142명이 다쳤다. 전세계에서 어린이 사망 원인 1위가 교통사고라는 통계도 있다. 당초 인간에게 이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던 도로는 폭주하는 자동차 문명 속에서 죽음의 도로로 바뀐 것이다.

자동차의 과잉은 자동차의 효율성도 파괴했다. 2004년 도로로 인한 교통혼잡 비용은 23조1천억원에 달했다. 자동차와 결합한 대형마트는 중소상인을 몰락시켰으며, 자동차로 뻗어나간 베드타운은 도심을 기형적으로 팽창시켰다. 그리고 자동차는 인간의 이동 능력을 무시하면서 인체를 퇴화시키고 있다.

“자동차는 커리어 우먼의 로망이었습니다. 2004년 말에 운전면허를 따고 이듬해 2월에 자동차를 샀지요.”

하지만 남미진(34)씨가 산 자동차는 그의 로망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남씨는 자동차로 출퇴근을 시작했고, 대형마트를 갔으며, 등산길 대신 비포장도로로 산을 올랐다. 자연스레 몸의 움직임이 적어졌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퇴근길 신촌에서 사당동까지 1시간 반 동안 전방을 주시하며 브레이크를 밟다 보니 몸이 경직됐다. 두어 달 만에 3~4kg이 늘었다. 여섯 달이 지나자 허리가 아팠다. 의사는 “허리 건강은 몸을 얼마나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지표”라면서 걸어다닐 것을 권유했다. 남씨는 자동차를 버리고 내친김에 회사 근처로 이사를 했다. 지금은 집에서 회사까지 하루에 30분씩 걷는다. 공원을 관통하는 출퇴근길은 자연스레 사색의 시간도 된다. 운전하면서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걸으면서는 생각하기 쉽다.

과소비를 부추기는 애인, 마이 카

현대 문명을 비판한 선구자 이반 일리치는 “자동차는 우리 발의 사용가치를 제거해버렸다”고 지적했다. 두뇌의 기능도 정지됐다.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는 “걷기는 우리 두뇌가 가장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며, 걷기가 세계의 가장 위대한 사상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예도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아인슈타인은 걸으면서 우주의 비밀을 궁구했고, 인류의 위대한 시들은 걸으면서 쓰여졌다. 남씨도 “자동차를 버리면서 몸도 좋아졌지만, 내 생활이 건강해졌다는 자부심으로 정신도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걷기라는 마술>(조지 트러벨리언 등 지음)은 전한다. “하루를 충실하게 걷고서 그 보상으로 자신의 영혼을 되찾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자동차를 버리면 불편하진 않을까. 김주교(40)씨는 이렇게 한마디로 답했다. “사실 그렇지 않아요. 담배 끊으면 담배 생각이 안 나듯이 자동차를 안 타면 자동차 생각이 안 나요.”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언제나 그렇듯, 두려움이 문제다. 하지만 막상 이별을 하면, 잊었던 ‘님들’이 떠오른다. 자동차와 일부일처제를 ‘강요’당하면서 잊었던 걷기부터 자전거와 버스와 지하철과 택시까지 다양한 파트너를 발견한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자동차와 ‘별거’도 가능하다.

김씨는 자동차와 이혼이 아닌 별거를 했다. 자동차는 아직 집에 있다. 대신 그는 20km 이내면 모두 자전거를 탄다. 성남 야탑동의 집에서 서울 강남의 서점이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자전거를 탄다. 물론 급할 때도 있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 대중교통이 불편한 처가나 친가를 갈 때, 그때는 택시를 타거나 별거 중인 자동차를 다시 꺼내면 그만이다.

자동차는 과소비를 부추기는 애인과 같다. 서울 상암동에 사는 최화랑(34)씨의 집은 대형마트에서 불과 500m 떨어져 있다. 하지만 항상 차를 타고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던 최씨가 자동차와 헤어지자 변화가 생겼다. “구매량이 달라지더군요. 자동차를 타고 갈 땐 10만원 이상 사왔는데, 자전거를 타니 4만~5만원어치 사와요.” 서울 잠실에서 자동차 선팅업체를 운영하는 김상범(33)씨의 가족은 아예 대형마트를 거의 가지 않는 ‘노마트족’이 됐다. 자신의 차를 친구에게 빌려줬고, 지금은 주변의 용답동 시장으로 장을 보러 다닌다.

지하철이 다 내 것이라 생각해보라

자동차와 이혼하면 연대의 삶을 체득한다. 자동차가 개인적 공간이라면 버스와 자전거는 열린 공간이다. 버스는 다른 사람과 나눠쓰며, 자전거는 구획 없이 열려 있다. 하지만 자동차에 앉은 사람은 창문과 철골로 세상과 분리된다. 김찬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강의교수는 “자동차의 폐쇄적인 공간 구조가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적 공간에서 긴장된 상태로 운전하는 자동차 운전자는 다른 자동차의 사소한 잘못에 쉽게 욕하기 십상”이라고 설명한다. 비교해보라. 자전거를 타다가 부딪치면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 이렇듯 자동차 이혼은 공동체 건강의 지표다. 심지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어다니는가’를 공동체의 건강도로 측정하는 연구도 있다.

김 교수는 자동차를 타면서 ‘역발상’을 해보라고 제안한다. “지하철을 타면 나의 지하철에 사람들을 태워줬다고 생각하고, 지하철 역사와 드넓은 도로가 내 것이라 생각해봐요.”

이렇게 행복은 상상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볼프강 작스는 <녹색평론>에 번역된 ‘되찾은 정적-자전거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개인 자동차를 갖고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갈수록 독립적으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더욱 의존적으로 되었다”고 말했다. 자동차의 자유라는 환상을 얻는 대신 기술문명에, 석유문명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자동차를 잃으면 동네를 얻는다. 윤호섭 교수는 골목 탐험과 인간 탐험을 즐긴다. “자동차를 버리면서 내가 사는 동네에 구멍가게와 문방구가 있고,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나와 있는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버스를 타면 사람과 어우러져요. 사람을 관찰하며 동정·혐오·책임감을 느끼지요.”

같은 길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다르게 보인다. “오랫동안 자동차 유리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거의 감각이 죽어버린 사람들이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게 될 때, 그들은 자기들이 뚫고 지나가는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놀란다.”(‘되찾은 정적-자전거를 위하여’)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자동차를 타지 않는 건 단순히 교통수단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동차와 이혼자들은 한결같이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가 바뀐다. 이웃이 다가오고 지구가 다가온다. 자동차 이혼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동차 문명의 개혁자들이다. 더구나 ‘더 크게, 더 멀리, 더 빨리’라는 현대적 가치는 무너지고 있다.

‘되찾은 정적-자전거를 위하여’는 “한때 사람들이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인 것은 터널과 비행기 항로로 둘러싸인 세계였지만 … 오늘날에는 보다 명상적인 이미지가 흔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날 방송에 나오는 아파트 광고를 보아도, 자연은 미래가 되었다. 이렇게 현대문명의 핵심인 ‘자동차주의’는 의심받는다. 갈수록 자동차 없는 인생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건강하고 멋진 것이 되고 있다. 21세기의 ‘멋진 신세계’에는 자동차가 없다. 21세기의 노마드는 자전거를 탄다. 더구나 자동차와 이혼하면 지구에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고, 운동함으로써 자신의 오염물질을 배출하게 된다. 이토록 나에게도, 남에게도 행복한 이혼은 없다.




나의 ‘비양심적’ 자동차 거부
민폐만 끼치는 아저씨, 무면허의 양심상 이유를 꼽아보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조금은 민망한 고백이다.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아니고 말하지 못한 내 결심이 있(었)다. 내 평생 고기, 성(性) 그리고 자동차는 사지 않으리라. 속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민망하게도, 하루라도 고기를 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도 유일한 위안은 아직은 자동차를 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사지 않을 생각이니 운전면허를 딸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양심적 자동차 거부자’라고 선언하면 좋겠으나, 현실은 내게 ‘비양심적 자동차 회피자’라고 말한다. 순진한(?) 시절엔 자동차가 없다는 것이 은근한 자부심이었지만, 자동차 권하는 사회는 자동차 없는 30대 아저씨에게 ‘나잇값 못하는, 사람 구실 못하는 놈’으로 자책하게 만든다.

유행가로 시작하자. 자동차 없는 자가 불러야 마땅할 노래는, ‘불효자는 웁니다’. 우리 집은 산동네다. 산동네 아파트에서 주말에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연로하신 어머니는 택시가 다니는 아파트 입구까지 5분은 걸어야 한다. 오른쪽 무릎이 아파서 걷기가 불편한 어머니를 보면서, 불효자는 운다. ‘땡빚’이라도 내서 차를 살까, 잠시 착한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러고는 잊는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비극적 대사는, ‘못난 오빠를 용서해라’. 여동생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 있었다. 배가 불러올수록 오빠는 은근히 불안했다. 산기를 느끼는 상황이 오면, 자동차가 없는 나는 얼마나 무력할 것인가. 다행히 착한 동생은 오빠가 회사에 있을 때 아이를 낳았다. 가부장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인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겪으면서, 만약 결혼해서 아기가 생긴다면 나 같은 흔들리는 거부자는 당장 자동차 대리점으로 달려가겠다, 확신했다. 나는 다만 아직 시험에 들지 않았을 뿐인지 모른다. 세 번째로 사죄할 대상은 회사의 선배다. 철마다 엠티(MT)를 갈 때면 언제나 민망하고 송구스러웠다. 경기도 어디든 강원도 산골이든 선배는 피곤을 쫓으며 운전을 하는데, 후배는 옆에서 말똥말똥 눈알만 굴렸다. 이렇게 자동차가 없으면 나는 괜찮지만, 남들은 편하지 않다. 민폐만 끼치는 아저씨는 ‘비양심적 자동차 회피자’인지도 모른다.

물론 몇 가지 양심상의 이유는 있다. 어언 7, 8년 전 우연히 읽은 글귀가 잊히지 않는다. <녹색평론>을 뒤적이다 “위험한 깡통에 목숨을 맡기고 시속 150km로 달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뭐 그런 글귀를 읽었다. 자동차 문명의 허상을 일거에 깨닫게 하는 촌철살인이었다. ‘돈오돈수’의 순간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총알택시를 탔을 때, ‘위험한 깡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심지어 뒷좌석에 앉아서도 안전벨트를 동여매고, 오른손은 차 천장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두 눈을 조용히 감는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무사히! 문 앞에 도착하면 진심으로 감사한다. 차라리 운전을 배워서 목숨을 부지할까, 고민도 한다. 두 번째 양심상의 이유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생겼다. 역시나 5, 6년 전 울산에 취재를 갔다가 “조합원들이 자동차를 사면서 노동운동에 위기가 닥쳤다”는 말을 들었다. 노동자들이 오토바이 대신 자동차를 타면서 대화가 줄어들고 술자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섣부른 적개심은 자동차를 공동체의 적으로 낙인찍어버렸다. 마지막 양심상의 이유는 현실적 이유도 된다. 언젠가 누군가 박홍규 영남대 교수를 소개하면서 “자동차를 타지 않는 대신에 비행기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고 썼다. 아, 그래서 그의 인생이 풍요롭구나, 혼자서 생각했다. 그리고 서너 달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면서 ‘자동차 비용을 아껴서 비행기를 타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의 수입으로 자동차를 산다면 비행기 타기를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렇게 이기적이다.

자동차는 연애의 기초다. 호감은 가지만 어떤 사람인지 모를 때, “자동차 있느냐”고 슬쩍 물어본다. 자동차를 굴리느냐 아니냐는, 내게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보는 지표다. 처음 만나서 ‘당신 좌파야?’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오히려 자동차가 없다면 섹시해 보였다. ‘음… 가산점 10점’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아닐까, 환상을 품는 것이다. 비록 환상일지라도 아직은 환상 속의 그대가 좋다.







월·금요일부터 대중교통을
선배들이 말하는 자동차와의 이혼 가이드북

▣ 사진·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자동차 별거에서 이혼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다. 자꾸만 엉덩이를 붙드는 ‘좌식 생활’ 욕구가 육체의 적이고, 바쁜 일상이 주는 속도의 압박이 정신의 적이다.

윤호섭 교수는 “처음엔 차가 막히는 월·금요일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라”고 충고한다. 이와 함께 골목 탐험의 재미를 느껴보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동네를 재발견하다 보면 굳었던 다리가 풀린다.

그 다음은 자전거를 장만할 차례다. 화석연료를 태우지 않고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는 자동차를 대체하는 훌륭한 개인 교통수단이다. 김주교(40)씨는 “동네 슈퍼나 도서관 등 가까운 주변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본격적인 별거는 주말 부부로 시작한다. 주중에는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나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다. 자동차 별거자들도 주말에는 대형마트나 패밀리 레스토랑 등을 자동차로 가는데, 이를 극복하면 진정한 ‘자동차 별거자’가 된다. 대다수 자동차 별거자들은 주로 여름휴가, 지방 친척 방문 때만 자동차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자동차 별거 중 조심해야 할 것은 ‘방전 사태’다. 김상범(33)씨는 “올해만 자동차가 세 번 방전됐다”고 말했다. 이럴 땐 별거 중인 자동차 배터리의 +극과 -극이 연결된 선을 빼두면 된다.

이혼은 자동차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최종적 도착지다. 자동차 별거를 하다 보면, 세워둔 자동차에 들어가는 세금과 보험금을 떠올리다 이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환경운동가만 이혼하는 게 아니다. 자동차 이혼자들 중에는 건강 때문에 강력한 처방으로 이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경에 대한 의식이 바뀌는 건 이혼 뒤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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