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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은커녕 4분도 못기다리겠다

4년은커녕 4분도 못기다리겠다

[오바마 시대와 한국]
2009년 01월 28일 (수) 09:50:38 김종철 언론인 ( media@mediatoday.co.kr)

   
  ▲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영화감독  
 
다시 시카고의 그랜트파크로 돌아가자. 나는 그 드넓은 공원에서 오바마를 향해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를 연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오래 전에 읽은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Dude, Where's My Country?)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미국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저술가인 마이클 무어가 2003년에 초판을 낸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6월 김남섭 옮김으로 한겨레출판사가 펴냈다).

무어는 <보울링 포 콜롬바인>이라는 영화로 미국 ‘총기산업’의 흑막과 그 산물인 무차별 살상의 이면을 고발한 뒤 <화씨 911>에서는 뉴욕 무역센터 폭파를 둘러싼 의문들을 설득력있게 제기한 바 있다.
이 책을 지금 다시 펼쳐보면 ‘부시 타도’를 위한 ‘육도삼략’ 같기도 하고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의 예언서처럼 읽히기도 해서 온 몸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 그중 흥미있는 대목들을 여기 소개하겠다.

아마도 2004년 선거에서 조지 W. 부시를 패배시키는 일보다 온 국민이 직면한 더 큰 지상 과제는 없을 것이다. 파멸로 가는 모든 길이 그와 그의 정부를 관통하고 있다. 이 미친 세월이 4년 더 지속된다면 캐나다조차도 그렇게 추운 나라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4년 더? 나는 4분도 더 못 견디겠다(위의 책, 269쪽).

무어가 대통령 부시를 ‘4분도 더 못 견디겠다’고 쓴 것은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관점에서 전적으로 무어에 동의한다.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 개표 때의 악몽이 또렷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 선거에서 W.부시는 미국 법과 제도의 온갖 허점을 이용해서 ‘당선’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동생 젭 부시가 주지사로 있는 플로리다주의 ‘부정 개표’ 혐의였다. 결국 앨 고어는 한달 남짓의 법정소송에서 패소하고 패배를 선언했다. 플로리다의 선거인단 표가 모조리 부시에게 감으로써  장기간 다툼을 계속해봤자 소득이 없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마 이클 무어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 국제사회의 무뢰한을 추방하기 위해서’ 부시를 누를 경쟁자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절감한 사람들은 2004년 대선을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민주당 후보 존 켈리 역시 낙선했다. 미국 대통령선거의 맹점인 50개 주별 ‘승자독식’ 규정 때문이었다. 부시의 손을 들어준 오하이오주가 세계사의 물길을 다시 한 번 역류시킨 것이었다.  그 대선 전에 무어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지난 1년 동안 받은 수천 통의 e-메일과 편지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절박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무얼 할 것인가?”
이 문제 다음에는 훨씬 더 무서운 질문이 따라나온다. ‘도대체 민주당은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당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69쪽).

   
  ▲ 지난해 12월14일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알 말리키 총리와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한 기자로부터 신발 봉변을 당했다.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무어는 2003년에 이런 제안을 한다.

우선 대통령은 백인이어야 한다고 믿는 일부터 그만두자. 백인은 유권자의 38%만을 차지하는, 이 나라에서 줄어들고 있는 소수 그룹이다. 게다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래 (1964년 압도적 승리를 거둔 린든 존슨을 제외하고) 대통령직을 차지한 민주당원은 모두 백인 남성의 표 없이도 선거에서 이겼다. 민주당은 백인 여성, 흑인 남성 및 여성, 그리고 히스패닉 남성 및 여성들의 압도적 다수가 그들을 찍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었다(272쪽).                                                      

이 글을 읽으면 마이클 무어가 2004년이 아니라 2008년 대선의 결과를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은 다음 구절들이다.

나는 우리가 또 우리나라가 흑인 대통령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미 폭스TV에서, 즉 폭스채널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쇼 중의 하나인 <24>에서 한 명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딥 임팩트>에서는 모건 프리먼이 대통령으로 나왔다(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하느님 역을 하고 있었다!). 할리우드는 <브루스 올마이티>가 피츠버그에서 상영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흑인을 하느님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273쪽).

철학자이든 시인 또는 소설가이든 음악이나 미술이나 영화에 종사하는 예술가이든 간에 훌륭한 지식인은 뛰어난 직관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과 당대의 진실을 바르게, 깊고 넓게 보는 힘이며 인류사회의 미래를 밝혀주는 원동력이다. 마이클 무어는 바로 이런 면에서 탁월한 지식인이다.

2004년 선거든, 그 다음 선거든 우리는 이 공화당을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후보를 찾아야 한다. 전제 조건은 대통령 후보가 상원의원이나 주지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후보가 전문적 정치인이 아니라 앨 샤프턴(흑인 민권운동가-옮긴이) 같은 시민이라면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부시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미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 2005년 대통령 취임일이 오면 저 능글맞게 웃는 사람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사람 말이다(275쪽).

2005년보다 꼭 4년 뒤인 2009년 1월 21일 ‘능글맞게 웃는’ 부시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백악관을 떠나기 한 달 남짓 전에 어떻게 보면 처량하고, 다른 면으로는 통쾌한 사건이 일어났다.

때 는 2008년 12월 14일, 바그다드의 기자 회견장. 느닷없이 이라크로 날아간 부시는 누리 알말리키 총리와 함께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안보와 이라크의 안정, 세계 평화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총리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 순간 이집트 카이로의 민영방송 <알바그다디아> 텔레비전 기자 무탄디르 알자이디가 “이라크인의 선물이자 작별 키스이다. 개놈아!”라고 소리치면서 신발 한 짝을 부시에게 던졌다. 이라크인인 그 기자는 “이건 미망인들과 고아, 그리고 이라크에서 죽은 사람들이 주는 것이다”라며 나머지 구두 한 짝도 집어던졌다. 부시는 머리를 숙여 첫  번째 신발을 피했다. 두 번째  신발도 ‘목표물’을 빗나갔다. 그 기자는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개!”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아랍권에서 신발을 던지거나 신발 바닥을 보이는 것은 큰 모욕 행위라고 한다.

그 소동이 끝난 뒤 부시는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신발 크기가 10이라는 것밖에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애써 태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사 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라크 보안당국이 무탄디르 기자를 체포하자, 이튿날 이라크 주요 도시들에서 군중이 “우리의 영웅을 석방하라”면서 시위를 벌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남자는 그가 부시에게 던진 신발 한 짝을 10만 달러에 사겠다고 나섰다.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의 딸은 그 기자에게 ‘용기의 메달’을 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흔한 말로 ‘해프닝’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왜 그런가?

오바마는 당선되면 미군을 이라크에서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레임 덕(절름발이 오리)을 넘어 ‘죽은 오리’가 되다시피한 부시는 퇴임을 한 달 앞두고 깜짝쇼를 하러 바그다드로 날아갔다. 아버지 부시는 물론이고 아들 부시 자신이 이란 견제용으로‘키워온’ 사담 후세인을 어느 날 갑자기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한 테러리스트로 몰면서 전쟁을 일으켜 놓고는 그 나라에서 불쌍하게 죽어간 수많은 백성에게는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그리고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덕담’도 없이 어설픈 고별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늘 영어도 제대로 못한다는 ‘지적 저능아’라는 혹평을 받던 처지에 농담이라고 ‘신발 문수’를 둘러대는 저질 연기를, 크리스마스를 열하루 앞둔 날 이슬람국가인 이라크에서 하면서 말이다.  아랍인 기자가 부시에게 던진 구두짝들은 그가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글쓴이 / 김종철

-전 동아일보사 기자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 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9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최초입력 : 2009-01-28 09:50:38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 출처 : 미디어오늘 - 4년은커녕 4분도 못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