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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앞 '통곡', 1919년 고종-2009년 노무현

고종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덕수궁 앞에서 거적을 깔고 통곡하는 '백의'의 한국인들


2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담벽 옆 도로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출처-오마이뉴스)


당신이 떠나신지 3일째입니다.
연 이틀을 아팠습니다.
전 지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머릿속엔 부엉이 바위만 가득합니다.
당신이 남긴 유서 내용만 맴돌 뿐입니다.

어제 낮, 봉하마을에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여기기엔 비가 너무 컸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울었습니다.
추모객들은 그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았습니다.
눈물과 빗물이 범벅이 된 그들을 보며
저와 제 아내도 함께 울었습니다.

통곡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서부터 10대 청소년들까지,
당신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바치려고
서너 시간을 줄지어 기다렸습니다.
주변엔 전경차가 병풍처럼 둘러싸 있었구요.
서러워 우는 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90년 전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1919년 고종황제가 서거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백성들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습니다.
마치 어제, 그제 시민들이 임시분향소를 찾았듯이 말입니다.

90년 전, 그들은 길바닥에 자리를 깔고 망국의 통한을 오열했다면,
이번엔 비극으로 생을 마친 한 지도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1919년 2월, 그 때는 일본경찰이 추모객들을 감시, 방해하였고,
90년 뒤인 2009년 지금은 한국경찰이 그 짓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90년 전 덕수궁 앞 통곡은 민족적 거사로 이어졌습니다.
1919년 ‘3.1만세의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력통치를 해오던 일제는 이후 기세가 꺾였습니다.
뒤이어 총독도 바뀌고, 더러 정책도 완화되었습니다.

9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대한문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전경차로 추모객들을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성난 민심은 한 순간에 둑을 무너뜨리고 말테니까요.

90년전 덕수궁 앞 모습--고종의 장레행렬을 보려고 나온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


90년 뒤인 2009년 덕수궁 앞 모습--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시분향소를 찾은 서울시민들(출처-오마이뉴스)


* 출처 : 블로그 '보림재' - 덕수궁 앞 '통곡', 1919년 고종-2009년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