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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펌]번역투 표현의 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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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한자말과 '~의'라는 일본말 옮김말투가 좀 거슬리지만...
아울러, '방가르르' 님께서 '있음에도 불구하고'를 '있는데도'로 고치면 좋겠다는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로부터 → ∼에서, ∼에게서’
‘∼를 갖다 → ∼를 하다, ∼를 열다’


물속에서 외래어종(魚種)이 토종 물고기를 마구 잡아먹으며 활개치듯이 외래어(語)가 우리말을 잠식하고 있는 데 대해 걱정들이 많다. 그러나 외래어만 문제가 아니라 영어 문장을 그대로 옮긴 듯한 번역투 표현 또한 우리말과 글을 오염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로부터’와 ‘∼를 가지다(갖다)’ 형태다.

요즘 정치인이나 권력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가면서 언론에는 “○○○은 모 기업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얼마를 받았고, 모 단체로부터 얼마를 받았으며, 모 씨로부터도 얼마를 받았다”는 식의 뉴스가 자주 보도된다. 이제 이런 얘기를 듣기도 지겹지만 문장에서 왠 ‘∼로부터’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지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로부터’를 이처럼 남용하는 것은 영어를 공부하면서 ‘from∼’을 ‘∼로부터’, ‘from∼ to∼’를 ‘∼로부터 ∼까지’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로부터 ∼까지’를 뜻하는 일본어 ‘∼카라 ∼마데(∼から ∼まで)’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우리말에서는 ‘∼에서’ 또는 ‘(사람·동물)에게서[한테서]’가 어울리는 자리에 ‘∼로부터’를 마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로부터’의 기원이나 쓰임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로부터’는 “인생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퀴 달린 탈것은 마차로부터 고속철도까지 발전해 왔다”처럼 유래나 구체적인 출발점을 나타낼 때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 업체는 한국으로부터 철수했다”에서는 ‘한국으로부터’보다 ‘한국에서’가 잘 어울린다. 특히 사람인 경우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다”보다 “아버지에게서[한테서] 재산을 물려받았다” “친구에게서[한테서] 편지가 왔다”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처음에 든 문장도 ‘모 기업으로부터’는 ‘모 기업에서’, ‘모 단체로부터’는 ‘모 단체에서’, ‘모 씨로부터’는 ‘모 씨에게서’로 바꿔 “○○○은 모 기업에서 불법 정치자금 얼마를 받았고, 모 단체에서 얼마를 받았으며, 모 씨에게서도 얼마를 받았다”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로부터’ 못지않게 영어 번역투 표현으로 지적되는 것이 ‘∼를 가지다(갖다)’ 형태다. 우리말에서 잘 어울리는 다른 서술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다’ ‘갖다’를 남용하는 것은 영어의 ‘have+명사’를 ‘가지다’ 또는 준말인 ‘갖다’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다.

“즐거운 시간 가지시기 바랍니다”가 두드러진 예로, “Have a good time”을 직역한 것이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나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가 우리말에서 어울리는 표현이다. ‘가지다’는 소유의 개념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어 두루 쓸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경우를 가리지 않고 마구 사용함으로써 어색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문제다.

‘기자회견을 갖다’ ‘회담을 갖다’ ‘집회를 갖다’ ‘간담회를 갖다’ 등은 ‘열다’ ‘하다’ ‘개최하다’ 등이 어울리는 자리에 ‘갖다’를 쓴 경우다. 이처럼 모두 ‘갖다’를 쓴다면 “이 단체는 어제 기자회견을 갖고 내일부터 지방 단위로 간담회를 가진 뒤 전국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갖기로 했다고 밝혔다”와 같이 ‘∼를 갖다’가 중복된 어색한 문장이 쉽게 나올 수 있다.

“양측은 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발표했다”와 같은 어설픈 표현도 자주 나온다. “양측은 회담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열고] 이같이 발표했다”가 정상적인 우리말 어법이다.

또 “우리 회사는 많은 협력업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3만원을 가지고 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말해 보라” 등은 ‘있다’가 어울리는 자리에 ‘가지다’를 쓴 경우다. “우리 회사에는 많은 협력업체가 있다” “나에게[나한테] 3만원이 있다” “좋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말해 보라”가 자연스럽다.

‘가지다’를 남용하면 더욱 어색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나는 세 명의 가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 등이 그런 예로, 가족이나 친구가 소유물이나 되는 듯한 표현이다. “나에게는 세 명의 가족이 있다” 또는 “우리 가족은 세 명이다”, “그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다” 또는 “그는 친구가 많다” 등이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말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오랜만에 즐거운 모임을 가졌다”가 그런 예로, 그대로 풀이하면 “오래도록 즐겁지 않은 모임이었는데 이번에는 즐거운 모임이었다”는 뜻이 된다. ‘모임을 가졌다’에 집착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오랜만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로 해야 제대로 된 표현이다.

이처럼 영어를 그대로 번역한 듯한 ‘∼로부터’와 ‘∼를 가지다(갖다)’를 남용함으로써 정상적인 우리말 표현 방식이 무너지고 있다. 상황에 따라 ‘∼로부터’는 ‘∼에서’ ‘∼에게서’로, ‘가지다(갖다)는 ‘열다’ ‘있다’ ‘하다’ ‘보내다’ 등 다른 적절한 단어로 바꾸어 쓰거나 우리말답게 문장을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퍼 온 곳 : "번역투 표현의 남용" - 중앙일보 교열부 차장 배상복 씀(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