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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5 [명상강론]명상은 기쁨이다
삶의 양념2004.11.15 00:00

[ 명상의 꽃 ]
명상은 단순히 인도에 국한된 방편이나 테크닉이 아니다. 명상을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상은 하나의 성장이다. 그것은 그대 삶 전체의 성장인 동시에 그대의 삶 전체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명상은 지금 그대가 처해있는 상황을 그대로 놔둔 채 거기에 덧붙힐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야만 명상이 그대를 찾아온다. 명상은 하나의 꽃이며 성장이다. 그리고 성장은 항상 전체로부터 오는 것이지 현재의 상태에 부가(附加)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명상은 그대에게 부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그대로부터, 그대의 전체성(totality)으로부터 자라나는 꽃이다. 그대는 명상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

 
거대한 침묵.
침묵은 흔히 부정적인 것, 소리나 소음이 부재(不在)하는 공허한 상태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가 만연해 있는 것은 지금까지 진정한 침묵을 경험한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이 침묵이라는 이름하에 경험하는 것은 소음의 부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침묵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침묵은 철저하게 긍정적이며 실존적이다. 그것은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그대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향기로 흘러넘친다. 침묵은 내면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빛으로 충만하다.
침묵은 허상이 아니라 분명한 실체이다. 이미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는 너무나 뚜렷한 실체이다. 다만 우리가 그 침묵의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 내면의 세계에는 고유의 맛, 고유의 향기, 고유의 빛이 있다. 그 세계에는 완벽한 침묵,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감돌고 있다. 그 침묵은 영원하다. 그 곳에는 어떠한 소음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언어는 그 세계에 닿을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닿을 수 있다.
그대 존재의 중심은 태풍의 눈과 같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중심은 영향받지 않는다. 그 곳은 영원한 침묵의 세계이다. 날이 가고 해가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생사윤회가 되풀이되어도 그대 존재의 영원한 침묵은 변함이 없다. 소리없는 음악과 신성의 향기는 항구불변한다. 그 침묵의 세계에는 언제나 동일한 초월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로부터 만물이 일시적으로 태어났다가 사라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대의' 침묵이 아니다. 그대 자체가 침묵이다. 침묵은 그대의 소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가 침묵의 소유물이다. 이것이 침묵의 위대함이다. 침묵의 세계에는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현존마저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의 세계는 너무나 깊고 광활하기 때문에 그 곳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침묵이 그대에게 진리와 사랑을 가져다 준다. 온갖 축복이 이 침묵에서 유래한다.
 
감수성의 성장.
명상은 그대에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져다준다. 세상에 대한 소속감을 가져다 준다. 이 세상은 우리의 것이다. 저 별들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존재계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며 이 세상의 심장이다.
명상을 통해 그대는 민감하게 깨어난다. 그래서 작은 풀잎마저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대의 감수성은 이 작은 풀잎 하나가 가장 큰 혹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 풀잎이 없으면 존재계는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이 작은 풀잎은 독특한 존재이다.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엔 고유의 개체성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감수성은 그대에게 새로운 우정을 선사할 것이다. 나무,새,동물, 산,강,바다,별들에 대해 그대는 전혀 새로운 우정을 느낄 것이다. 사랑과 우정이 성장할 때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사랑은 명상의 향기이다.
명상을 하면 그대는 곧 사랑과 마주칠 것이다. 명상이 깊어지면 그대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엄청난 사랑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 존재의 새로운 특질이며, 새로운 문의 열림이다. 그대는 새로운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이제 그것을 나누어주고 싶어한다. 사랑이 깊어지면 서서히 그대는 그 사랑이 점점 더 명상으로 변형되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침묵의 미묘한 특성이 그대 안으로 흘러든다. 사념이 사라지고 그 사념들 사이에 간격이 생겨난다. 그 간격에 침묵이 있다! 그대는 자기만의 깊은 심연과 만난다.
올바른 사랑은 그대를 명상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올바른 명상은 그대를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변형시킨다.
그대는 마음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명상에서 피어난 사랑을 원한다. 명상에서 피어난 사랑, 지금까지 내가 졸곧 이야기해온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수많은 연인들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기대심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은 단순히 '기대'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그들은 거짓된 사랑을 통해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다. 그래서 연인들 사이에는 절망과 권태, 잔소리, 싸움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사랑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음은 영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을 원하기에 앞서 명상으로 깊이 들어가라. 명상으로부터 사랑이 피어날 것이다. 사랑은 명상의 향기이다. 명상은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이다. 그 연꽃이 피어나게 하라. 명상은 그대로 하여금 수직의 차원, 마음과 시간이 사라진 차원으로 들어가도록 돕는다. 그 도움을 기꺼이 허용하라. 그러면 돌연 그대는 사랑이라는 향기가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영원하며 아무 조건도 없다. 그 사랑은 특정한 대상을 향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그 사랑은 '관계'가 아니라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특성이다. 그것은 상대방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대는 사랑으로 충만하다. 그대가 곧 사랑이다. 그 사랑은 영원하다. 그 사랑은 그대의 향기이다. 붓다, 짜라투스트라,예수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이 그런 사랑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비.
붓다는 사랑을 "사랑 더하기 명상"으로 정의했다. 그대의 사랑이 단순히 타인에 대한 욕구나 필요가 아닐 때, 거지처럼 구걸하는 사랑이 아니라 황제처럼 나누어주는 사랑일 때, 무엇인가 댓가를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순수한 즐거움일 때, 그럴 때 거기에 명상을 더하라. 그러면 순수한 향기가 퍼져나갈 것이다. 갇혀있던 광채가 눈부시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것이 자비이다. 자비는 지고의 특성이다. 섹스가 동물적이고 사랑이 인간적이라면 자비는 신성한 것이다. 섹스는 육체적이고 사랑은 심리적인 것이지만 자비는 영적인 것이다.
 
이유없는 기쁨.
그대는 돌연 아무 이유도 없이 기쁨을 맛본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유가 있어야만 기쁨을 느낀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을 때, 항상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멋진 정원이 딸린 집을 구입했을 때 그대는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만일 그대의 기쁨이 어떤 요인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면 그 기쁨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그 기쁨은 깊은 슬픔만을 남긴채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기쁨은 항상 그런 식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이 있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특성은 그 기쁨이 아무 이유없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이다. 뚜렷한 이유를 집어낼 수 없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기쁨에 넘치는 이유를 말할 수 없다. 거기엔 이유가 없다. 단지 그러할 뿐이다. 이 기쁨은 동요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이 기쁨은 지속될 것이다. 세월이 가도 이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가 젊을 때나 늙었을 때나, 활발하게 살아있는 상태이거나 임종을 맞는 순간이든 이 기쁨은 항상 거기에 존재한다. 이렇듯 환경의 변화에 상관없이 항존(恒存)하는 기쁨을 발견했다면, 이것은 그대가 깨달음에 가까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지성은 반응의 능력이다.
지성은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삶은 유동적인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상황의 변화가 어떤 도전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지성적인 사람은 상황에 따라 대응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미 정해진 해답을 갖고있다. 그 해답이 붓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해도, 그리스도 또는 크리슈나에게서 유래한 것이라해도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경전을 인용할 뿐 스스로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반면 지성적인 사람은 자기자신의 통찰력에 의존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믿는다. 그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비지성적인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고 의지한다.
지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명상 뿐이다. 명상이 단 하나의 길이다. 사회는 그대가 지성적으로 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명상은 그 장애물들을 파괴한다. 명상은 간단하게 장애물을 제거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명상은 부정을 통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명상은 그대의 샘물이 흐르는 것을 막고 있는 바위돌을 치워준다. 그래서 그대의 샘물이 용솟음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회는 커다란 바위돌로 그 통로를 막아놓았다. 그대는 사회가 설치해 놓은 죽(竹)의 장막에 갇혀 버렸다. 그 모든 감옥에서 벗어나 다시 걸려들지 않으려면 오직 지성의 힘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지성을 회복하려면 명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감옥들은 그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감옥들은 그대의 존재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들은 그대의 마음을 오염시킬 뿐 그대의 존재를 오염시킬 수는 없다. 그것들은 오직 마음을 덮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그대는 기독교, 힌두교,자이나교, 불교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온갖 쓰레기들이 일격에 끝장날 것이다.
마음 밖으로 나와 그것을 주시할 때, 단순히 주시자로 존재할 때 그대는 지성적이다. 그대는 지성을 회복한 것이다. 사회는 그대에게 온갖 해악을 끼쳐왔지만 그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해악들을 파괴했다. 그대는 성직자와 정치가들이 공모한 교활한 술수를 파괴했다. 그대는 그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 사실, 그대는 생애 최초로 진정한 인간이 된 것이다. 이젠 우주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지성은 자유를 가져다 준다. 지성은 즉흥적인 자발성(spontaneity)을 가져다 준다.
 
독존(獨存)은 그대의 본성이다.
홀로있음(aloneness)은 그대의 가슴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긍정이며 건강함이다. 홀로있음은 그대의 진아(眞我)가 누리는 즐거움이며 그대만의 내적 공간에 충만한 기쁨이다.
명상은 "홀로있음의 지복"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을 때, 그대는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홀로있음은 그대 고유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아침이든 저녁이든, 낮이나 밤이나, 젊을 때나 늙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대의 홀로있음은 변함이 없다. 홀로있음은 삶 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서도 유지된다. 왜냐하면 홀로있음은 외부로부터 그대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홀로있음은 그대 안에 샘솟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 자체이다.
내면의 여행이란 절대적 독존의 세계로 가는 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여행에는 아무도 데리고 갈 수 없다. 그대의 중심은 어느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과도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 자연의 이치상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그러한 이치에 대해서는 손쓸 도리가 없다. 그 독존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세계와 연결된 모든 고리가 끊어진다. 모든 다리가 무너진다. 세상 전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런 까닭에 신비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실재하지 않는 환상, 즉 마야(maya)라고 부른다. 내면 깊숙히 들어간 명상가에게는 이 세상 전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면에 자리한 침묵의 세계는 너무나 깊고 심오하다. 어떠한 소음도 그 침묵을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독존의 세계는 너무나 깊기 때문에 그 곳으로 들어가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그 독존의 세계로부터 지복이 폭발하듯 용솟음친다. 그로부터 신을 경험하게 된다. 다른 길은 없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독존의 세계를 축복으로 받아들여라. 그대만의 순수한 공간을 축하하라. 그러면 그대의 가슴 속에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다. 그것은 깨어있는 의식의 노래이며 명상의 노래이다. 그것은 먼 곳에서 들리는 외로운 새들의 노래소리이다. 특정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가슴이 노래로 충만하기 때문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비를 가득 머금은 구름이 비를 뿌려주기 원하는 것처럼, 꽃이 활짝 피어나 목적지도 없이 향기를 발산하듯이......그렇게 그대의 독존을 하나의 춤이 되게 하라.
 
진아(眞我).
명상은 그대의 진아를 깨닫기 위해 고안된 방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진아는 그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진아는 이미 그대와 함께 존재하며 그대와 더불어 태어났다. 그대가 바로 진아이다! 이 진아를 회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사회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사실, 진아의 회복을 허용하는 사회는 없다. 진아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교회집단에도 위험하고 국가에도 위험하다. 대중들에게도 위험하고, 전통에 비추어봐도 위험한 일이다. 자신의 진아를 알게 된 사람은 독립된 개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심리적으로 더 이상 군중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라는 미신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착취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가축처럼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명령에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빛에 의지해 살아갈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이다. 그의 삶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으로 빛날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것을 두려워 한다.
분열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인간은 자주적인 개인이 된다. 그러나 사회는 그대가 개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회는 개체성(individuality)대신 퍼스낼러티(personality)를 가르친다. 이 '퍼스낼러티'라는 단어를 이해하라. 이 단어는 '페르조나(persona)'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페르조나는 가면을 의미한다. 사회는 그대가 누구인지에 대해 거짓된 관념을 심어준다. 사회는 그대에게 장난감을 안겨주고, 그대는 평생동안 그 장난감에 매달려 살아간다.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길을 잘못들었다. 의사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사람이 화가가 된다. 화가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사람이 의사가 된다. 자신의 길을 제대로 선탣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사회가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마다 나아갈 길이 다른데, 그 길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자기 고유의 직관에 의해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명상은 그 고유의 직관적 능력이 성장하도록 도울 것이다. 명상을 하면 무엇이 그대의 잠재성을 완성시킬지, 그대가 활짝 피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독특한 존재이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추구하고 찾는 것은 스릴이 넘치는 일이며 커다란 모험이다.

 
* 출처 : 명상나라(내용: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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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 :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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