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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 일본말 찌끼들

우리말 속 일본말 찌끼들
‘입장·역할·식사’ 등 낱말, 일본말 ‘の’를 옮겨 쓴 ‘의’
미디어다음 / 고준성 기자
 
‘한식당인 비원에서 닭도리탕으로 푸짐하게 점심 식사를 가졌다.’ / ‘우리나라는 이미 유엔 주재 대사를 통해 사실상 반대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 ‘일본 정부의 입장부터 교정하는 것이 수순이다.’

‘우리말 사용법을 알려주고…’ / ‘직장에서의 윤리와 사생활간의 경계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 ‘중국에 있어서의 운동이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때였다.’ / ‘나름대로의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결정임을 밝힌 것으로…’

‘악법임에 틀림없다.’ / ‘현시점에서 들춰내지 않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 ‘행사에 많은 참여 있으시기 바랍니다.’ / ‘수작들이 나온 사실만으로도 발품에 값한다.’ /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지난 며칠 동안 우리나라 신문과 방송이 쓴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에는 하나같이 일본말 찌끼가 있다(굵게 표시한 부분). 물론 언론만 이처럼 일본말 찌끼를 쓰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말 찌끼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글 바로쓰기 1~3권’(이오덕, 한길사),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김세중 외, 한겨레신문사) 등 우리말을 올바로 쓰는 법을 다룬 책들을 참고해 우리말 속 일본말 찌끼들을 유형별로 알아본다.


낱말로 남은 일본말 찌끼들

우리말에 낱말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말로는 먼저 ‘사시미·와사비·아나고·모찌·닭도리탕’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일본말 찌끼들이 이런 것들뿐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다. 일본말 어감을 강하게 풍기는 이 말들은 이미 ‘생선회·고추냉이·붕장어·찹쌀떡·닭볶음탕’ 등 우리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우리말이나 한자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본말에서 비롯한 낱말들이다. 이런 것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낱말은 ‘입장·역할·식사’ 등이다. ‘입장을 밝히다’, ‘역할을 다하다’, ‘식사를 하다’ 따위로 사용되는 이 낱말들을 기사에서 찾아보면 우리 신문과 방송이 이 말들을 10분마다 한 번씩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입장·역할·식사’는 모두 우리말도 한자말도 아닌 순 일본말의 찌끼다. ‘입장’은 일본말 ‘다치바(立場)’를 한자로 적은 것을 그대로 읽은 것이다. ‘역할’도 본디 연극을 할 때 각자 역을 나눠 맡는다는 뜻을 지닌 일본말 ‘야쿠와리(役割)’를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식사’ 역시 ‘쇼쿠지(食事)’라는 일본말이다.

‘입장’은 ‘입장을 밝히다’를 비롯해 ‘입장을 취하다’, ‘입장을 고려하다’, ‘입장이 다르다’ 등 아무데나 붙여 써도 다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아무데도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이 표현들에서도 ‘생각·뜻·견해’, ‘방침·태도’, ‘형편·체면·처지’, ‘의견·의사·주장·소견’ 등으로 바꿔 쓰면 된다.

‘역할’도 ‘입장’만큼 자주 쓰인다. 이 낱말은 2003년 국립국어원이 한 ‘낱말 잦기 조사’에서 우리나라 낱말들 가운데 443번째로 자주 쓰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탓에 ‘구실’이라는 우리말이 사라져가고 있다. ‘식사’는 일본군대에서 쓰던 말로, 일본군 출신들이 우리나라 군대에 퍼뜨린 것이다. ‘역할’과 ‘식사’는 각각 ‘구실’이나 ‘할 일’, ‘’이나 ‘진지’를 써서 뜻을 전하면 된다.

이 밖에 일본말 찌끼인 낱말들은 ‘속속·지분·수순·신병·인도·미소·옥내·옥외·세면·천정·하치장·상담·수속·수취인·입구·치환·담합’ 등이 있다. 이 말들은 ‘자꾸·몫·차례·몸(신분)·건넴·웃음·실내·바깥·세수·천장·버리는 곳·상의·절차·받는 이·들머리·바꿈·짬짜미’ 등으로 바꿔 쓰면 된다.


일본말 ‘の’를 옮겨 쓴 ‘의’

일본말의 매김자리토씨(관형격조사) ‘の’를 그대로 옮겨 쓴 ‘의’는 우리말을 더럽히는 주범이다. 일본말 ‘の’와 우리말 ‘의’는 엄연히 쓰임새가 다른데도 ‘의’를 우리 문장에서 ‘の’처럼 쓰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임자자리토씨(주격조사)나 부림자리토씨(목적격조사)가 쓰일 자리에 ‘의’가 쓰이고, 문장에 어설픈 겹토씨가 쓰인다.

예컨대 ‘우리말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부림자리토씨 ‘을·를’ 대신 매김자리토씨 ‘의’를 쓴 우리말답지 않은 문장이다. ‘우리말의 사용법’을 ‘우리말 사용법’이나 ‘우리말을 사용하는 법’으로 고쳐 써야 일본말 찌기를 걸러낸 우리말다운 문장이 된다.

우리말 ‘의’를 일본말 ‘の’처럼 쓴 겹토씨는 ‘~마다의·~(로)부터의·~에서의·~에의·에게의·~에 있어서의·~(으)로서의·~대로의’ 등이 있다. 앞서 예로 든 ‘직장에서의 윤리와…’, ‘중국에 있어서의 운동이…’, ‘나름대로의 심사숙고…’ 따위는 모두 겹토씨를 쓴 어색한 문장들이다.

‘에서의’는 일본말에서 행동하는 곳을 뜻하는 토씨 ‘で’에 ‘の’를 겹친 ‘での’를 흉내 낸 것이다. ‘에게의’는 일본말 겹토씨 ‘への’를, ‘에 있어서의’는 ‘においての’를 그대로 번역한 말투다. ‘대로의’도 토씨 ‘대로’에 토씨 ‘의’를 겹친 이상한 겹토씨다. 이것들은 모두 ‘의’를 빼고 적절한 우리말 토씨를 써야 한다.


일본말을 직역해 남은 찌끼들

일본말을 직역한 어색한 구절이 우리말에 찌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몇몇 지식인들이 유식한 말투를 쓴답시고 허투루 이런 구절을 써온 탓이다. 앞서 예로 든 ‘악법임에 틀림없다’, ‘말에 다름아니다’, ‘참여 있으시기 바랍니다’, ‘발품에 값한다’ 등이 그런 어색한 구절들이다.

‘~임에 틀림없다’는 일본말 ‘~にちがいない’를 직역해 우리말로는 토씨 ‘이’를 써야 할 자리에 일본말 ‘に’를 그대로 옮긴 ‘에’를 쓴 구절이다. ‘악법임에 틀림없다’가 아니라 ‘악법임이 틀림없다’로 써야 우리말다운 표현이 된다. 그림씨(형용사)인 ‘틀림없다’가 문장에서 주어 없이 홀로 서술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 다름아니다’도 ‘~にほかならない’를 직역한 구절이다. ‘다름아니다’를 ‘똑같다’나 ‘다름없다’로 바꿔 써야 일본말 찌끼를 걸러낸 표현이 된다. ‘말에 다름아니다’가 아니라 ‘말과 똑같다’나 ‘말과 다름없다’로 써야 우리말답다. 또 ‘참여 있으시기 바랍니다’는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로, ‘발품에 값한다’는 ‘발품을 팔 만하다’로 쓰는 게 옳다.

아울러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라는 구절에서 쓰인 ‘보다’도 일본말 찌끼다. 우리말 ‘보다’는 두 가지를 서로 견주는 데 쓰는 토씨이지 ‘’를 뜻하는 어찌씨(부사)가 아니다. 그런데 ‘보다’에 해당하는 일본말 ‘より’는 토씨로도 쓰이고 어찌씨로도 쓰여 ‘더’를 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보다 체계적으로’라는 이상한 표현이 우리말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