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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5 [명상강론]경험에 얽매이지 마라
삶의 양념2004.11.15 00:00

[ 그대의 경험이 그대는 아니다 ]
가장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내면의 여행에서 어떤 경험과 만나든 간에 그대는 그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대는 그 경험을 주시하는 자이다. 그것은 무(無),지복, 또는 침묵의 경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혹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대는 그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경험하는 자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아무런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거기엔 침묵도 없고 지복도 없고 무(無)도 없다. 대상은 사라지고 오직 그대라는 주체만이 남는다. 거울이 텅비어 있다. 거기엔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다. 그 거울이 바로 그대이다.

 
내면의 여행을 떠났던 위대한 구도자들조차 아름다운 경험을 맛보고는 그 경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졌다. 그들은 "나는 나자신을 발견했다고"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경험이 사라지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전에 여행을 그만둔 것이다.
깨달음은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알아야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철저하게 그대 홀로 존재하는 상태이다. 대상이 부재한다. 그런 순간에 도달해야만 그대의 의식이 대상에 걸려넘어지지 않고 방향을 전환하여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자기 실현(self-realization), 깨달음이 된다.
이 '대상'이라는 단어에 주의하라. 모든 대상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대상이라는 단어의 의미자체가 장애물이다. 그대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물질세계이며, 그대의 내면에 존재하는 대상이 심리적인 세계이다. 대상은 그대의 가슴, 느낌, 감정, 감상, 기분 등에도 존재한다. 심지어는 영적인 세계에도 대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대상적 경험들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환희에 차 있다. 더 이상의 환희는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그래서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그러한 법열(法悅)의 단계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 단계는 그지없이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집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경험이 부재하는 단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의식은 아무런 걸림돌없이 순환하기 시작한다. 장애물만 없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순환한다.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존재라는 똑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대상이라는 장애물이 없을 때 의식은 거꾸로 역행하여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다.
이것이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가 평생을 두고 말한 것이다.- 관찰자가 관찰되면 그대가 집에 도달했다는 징표이다. 그전에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체는 고유의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쿤달리니(kundalini) 경험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신체 내에 있는 일곱 개의 센터가 일곱 송이의 연꽃으로 피어난다. 위로 올라갈수록 연꽃은 더 크게 피어나며 취할듯이 향긋한 향기가 퍼져나간다. 신체의 각 센터가 개화되면서 마음은 그대에게 거대한 공간, 무한한 공간을 선사한다. 그러나 명상의 길에서는 "그대는 아직 집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소중한 격언을 명심하라.
즐겁게 여행하라.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 풍경을 만끽하라. 나무, 산, 계곡, 강, 하늘의 달과 태양과 별 등 모든 것을 즐겨라. 그러나 그대라는 주체(subjectivity) 자체가 그 대상이 되지 않는 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말라. 관찰자가 관찰되고 아는 자가 알려질 때, 보는 자가 보여질 때 그대는 비로소 집에 당도한 것이다. 이 집이 진짜 사원이다. 그대가 여러 생동안 찾으면서도 항상 길을 잃고 헤매야했던 그 사원이 바로 이 집이다.
우리는 황홀한 경험과 마주치면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해 버린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기있는 구도자들은 이 모든 경험을 뒤로하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경험이 사라지고 오직 '홀로있음' 안에 존재할 때.....그보다 더큰 환희가 없고 그보다 더한 지복이 없다. 그보다 더 진실한 것이 없다. 그대는 내가 신성(godliness)이라고 부르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대는 신이 되었다.
어느 노인이 의사에게 말했다.
"나는 화장실 가는데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래요? 소변은 어떻습니까?"
"매일 아침 일곱시에 봅니다. 아기처럼요."
"좋습니다. 그러면 대변은 어떤가요?"
"아침 여덟시에 봅니다. 시계처럼 정확하지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문제는 내가 아홉시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이제 깨어날 때가 되었다. 명상 중에 마주치는 이 모든 경험은 깊이 잠들어 있는 마음이 겪는 것이다. 깨어난 마음에는 결코 경험이 없다.
관찰은 주시가 아니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이것이 주시의 양 측면이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서로 용해되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주시의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겪는 것은 주시자를 관찰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시자와 관찰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은 착각이다. 관찰자는 결코 주시자가 아니다 다만 주시의 일부일 따름이다. 부분을 전체로 생각하는 것이 오류이다.
관찰자는 주체를 뜻하고 관찰되는 것은 대상을 뜻한다. 우리는 흔히 관찰의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고 관찰자는 내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부와 내부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공존, 또는 하나됨(oneness)이 경험되어야 비로소 주시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대는 주시를 연습할 수 없다. 만일 주시를 연습한다면 그대는 관찰자를 훈련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관찰자는 주시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로 용해되는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장미꽃을 볼 때, 보여지는 대상이 있고 보는 주체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라. 그 아름다움의 순간, 그 은총의 순간에 녹아들어가라. 그러면 그대와 장미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대와 장미는 하나의 리듬, 하나의 노래, 하나의 환희가 된다.
사랑할 때, 음악을 들을 때, 불타는 석양을 바라볼 때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그런 합일의 순간이 더 많아질수록 좋다. 그리고 이것은 어려운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재주를 터득하라.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그 재주를 써먹을 수 있다.
주시가 솟아오르면 주시하는 자도 없고 주시되는 것도 없다. 그것은 텅빈 거울,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이다. 심지어 그것을 거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옳지않다. 단지 '비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다. 주시는 더 역동적인 용해와 합일의 과정이다. 그것은 정체된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다. 장미가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그대는 장미 안으로 들어간다. 서로의 존재를 나누어 가진다.
주시자가 곧 관찰자라는 생각을 버려라. 관찰자는 훈련될 수 있지만 주시자는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 관찰은 일종의 집중이다. 그리고 그대를 분리된 상태로 유지시킨다. 관찰은 그대의 에고를 고양시키고 강화한다. 관찰자가 되면 될수록 그대는 멀리 떨어진 외딴 섬처럼 느껴질 것이다.
유사 이래 전 세계의 수도사들이 관찰을 훈련해 왔으며 이것을 주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주시가 아니다. 주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관찰은 훈련되고 개발될 수 있다. 훈련을 통해 그대는 더 훌륭한 관찰자가 될 수 있다.
과학자는 관찰하지만 신비주의자는 주시한다. 과학의 전과정은 관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무 것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정밀하고 날카로운 관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학자는 신을 알지 못한다. 그의 관찰이 철저하게 숙련된 것이라해도 그는 신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 그는 결코 신을 만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의 모든 작업은 관찰을 통해 이루어지며, 관찰하면 할수록 그는 존재계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벽이 솟아오른다. 그는 자신의 에고 안에 갇혀버린다.
신비주의자는 주시한다. 그러나 주시는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주시는 어떤 상황이나 경험 속에서도 전체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전체성(totality)이 핵심이다. 전체성으로부터 주시라는 은총이 솟아오른다.
관찰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라. 관찰은 대상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줄 것이지만 그대 자신의 의식에 관해서는 아무런 앎도 주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의 의식에 관한 한 여전히 장님으로 남을 것이다.
 
* 출처 : 명상나라(내용: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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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 :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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