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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거리

우리집엔 지렁이 키워요

우리집엔 지~렁~이 키워요

[한겨레] 요즘 음식물 쓰레기를 주제로 잇따라 열리고 있는 토론회나 발표회에서 지렁이 이야기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렁이를 활용한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특히 내년 1월로 잡힌 유기성 폐기물의 매립장 직접매립 금지조처 시행일이 다가오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지렁이를 활용해 성공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1. 세상 보는 눈 바꿔준 고마운 지렁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리 없이 쓰레기를 삼켜 비옥한 흙으로 바꿔 내놓는 것을 보면 지렁이가 부처님이 아닐까 생각해요.” 주부 윤태순(40·서울 동대문구 휘경2동)씨가 거실에 조그만 지렁이 화분 2개를 처음 들여 놓은 것은 2002년 겨울. 지렁이 화분 보급 운동을 펴는 정토회 불교환경교육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것이 계기가 됐다.

용기를 내 가지고 왔지만 처음에는 징그런 느낌을 떨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한 번은 화분 속에 배추 잎을 지렁이가 미처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넣는 바람에 부패가스가 가득 차, 이를 피하려고 지렁이들이 기어나왔을 때는 지렁이 화분을 들여 놓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화분 속을 들여다보니 흙에 짧은 실밥 같은 것이 하얗게 퍼져 있었어요. 어느 사이엔가 지렁이들이 알을 낳아, 그 알들이 깨어난 것이었지요.” 일주일 뒤 음식물을 주기 위해 흙을 뒤적여보니 흰 실밥 같았던 아기 지렁이들은 살이 올라 발그레했다. 윤씨는 “지렁이도 귀여울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고 말했다.


꼬물꼬물 지렁이 우리집에 가득하다
거실 화분속에 현관 화분속에‥
음식물 쓰레기 넣어주면
흙으로 변신시키는 신기한 마술‥
지렁이 몇마리 키워보실래요?


지렁이들은 매일 자기 몸무게 절반 가량의 음식물 쓰레기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윤씨는 썩기라도 할까봐 일부러 적게 준다. 이제 6개로 늘어난 지렁이 화분이 처리하는 음식물 쓰레기량은 일주일에 200㎖짜리 우유곽 5개 분량이다. 윤씨집에서 평소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의 40% 정도 되는 셈이다.

처음에는 10%도 안됐던 처리율이 4배 가량 높아진 것은 화분 수가 늘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렁이로 처리하는 비율을 높이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음식물 쓰레기량이 저절로 줄어들더군요.” 달라진 것은 그것 만이 아니다. 우선 설겆이 때 쓰는 세제량이 크게 줄었다.

음식물 쓰레기에 스며들어 지렁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걱정해서다. 지렁이는 아이들도 바꿔 놓았다. 지렁이 화분 근처에도 잘 가려 하지 않던 딸 원정(10·휘경초등 4)이는 이제 지렁이를 보면서 “지구를 오염시킬 쓰레기를 기름진 흙으로 바꿔주는 고마운 동물”이라고 말한다. 아들 일지(7·휘경초등1)는 지렁이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만지는 것 쯤은 아무렇지 않게 한다.

윤씨 자신도 주변으로부터 ‘지렁이 키우더니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윤씨는 “징그럽기만 하던 것이 부처님처럼 보이니 달라진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내년 봄부터는 지렁이가 잘 먹는 식물성 음식물 쓰레기는 모두 지렁이로 처리해 보려고 한다. 화분 수를 늘리고, 음식물 쓰레기 나오는 것을 더 줄이면 해 볼만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 지렁이 이용 음식물 쓰레기 처리 8년째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청에 근무하는 이해철(44·서울 은평구 불광동)씨 집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지렁이 화분으로 처리하기 시작한 지는 올해로 벌써 8년째다.

정토회 불교환경교육원이 지렁이 화분 가정 보급 활동을 시작한 것이 2002년말인 점을 감안하면, 이씨는 굳이 내세우지 않지만 지렁이 화분의 ‘원조집’이라고도 할 만하다.

이씨의 지렁이 키우기는 1997년 거실에 놓아 둔 스킨답서스 화분에서 우연히 지렁이 3~4마리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구청에서 쓰레기 처리 업무를 맡아, 하수·분뇨처리장 슬러지 처리에 지렁이가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였다. 반은 호기심으로 화분에 음식물 쓰레기를 묻었던 것은 2002년 서울산업대에서 지렁이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주 찾아간 이씨의 단독 주택에는 현관에 2개씩 포갠 화분이 6개, 옥상에 화분 2~3배 크기의 스티로폼 상자가 2개 있었다. 평상시 이씨 집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음식물 쓰레기를 전량 처리해주고 있다는 ‘자연의 청소부들’의 집이자 일터였다. 음식물 쓰레기 만이 아니었다. 이씨가 뒤적여 보여주는 화분 속에는 마당에서 주워 넣은 듯한 휴지와 나뭇잎들도 섞여 있었다.

“애완견 똥은 말할 것도 없고, 고기 종류도 시간이 좀 걸릴 뿐 다 처리됩니다.

4~5일에 한번씩 음식물 쓰레기를 보충하기 위해 화분을 뒤적여 보면, 모두 분변토로 바뀌고 단단한 고기 뼈와 쓰레기에 섞여 있던 비닐과 같은 이물질만 남아 있습니다.” 지렁이를 키울 때 조심할 점은 화분 속에 물이 고이게 하거나, 너무 염분이 많은 음식물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 등이다. 이 가운데 이씨가 경험상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겨울철에 화분을 얼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가 딱 한번 지렁이들을 떼로 죽인 것이 바로 몇년 전 영하 12도까지 내려간 날씨에 지렁이 화분을 밖에 그대로 뒀던 때문이었다. 그 때의 아픈 경험을 통해 이씨는 물을 채운 생수병에 열대어 수족관용 히터를 넣어 화분 속에 묻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집에서 지렁이를 키운다는 ‘괴짜 공무원’ 이야기가 점차 알려지면서 4, 5년 전부터 이씨 집은 지렁이를 이용한 음식물 쓰레기 처리방법에 관심을 가진 단체나 사람들의 견학 장소가 됐다. 이씨는 “주변에서 많이 와서 보고 가지만 막상 지렁이를 키워보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