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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양념

[명상강론]명상 안에서의 동반자 관계

[ 몇가지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야할 사실이 있다 ]
첫째,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상대방의 반쪽인 동시에 서로 대립된 양극(兩極)이다. 이 대립된 극성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진다. 서로 상반된 점이 많을수록 매력과 아름다움,그리고 유혹하는 힘이 강해진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남성과 여성은 가까이 있을 때 더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서로의 안으로 녹아들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whole)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은 상반되는 성질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들 사이의 조화는 이 상반되는 성질을 어떻게 용해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이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연애관계는 고민과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모든 연인들이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들이 아니다. 사물의 이치상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왜 그토록 엄청난 힘으로 상대방에게 끌려들어가는지 모른다. 거기엔 기본적인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연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관계라는 것이다. 일단 만나고 나면, 예전에는 매력을 발휘하던 그 상반된 성질이 이제는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서로의 태도가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똑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과 여성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남성은 아무 멀리있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예를 들어, 미래의 일이라든가 다른 혹성에도 생명체가 살고있을까 하는 문제가 관심사가 된다. 반면에 여성들은 남성들의 이런 면을 비웃는다. 여성들은 이웃이나 가족의 사소하고 잡다한 일에 관심을 가진다. 어느 집 남자가 부인을 속이고 있는지, 어느 집 여자와 자가용 운전사와 사랑에 빠졌는지 등등의 일이 여성들의 관심을 끈다. 여성의 관심사는 매우 지엽적이고 인간적이다. 여성은 부활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사후(死後)의 삶이 있는지조차 무관심하다. 여성의 관심은 더 실제적인 일에 쏠려있다. 여성은 현재,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남성은 결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그는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는 부활이라든가 사후세계라든가 하는 이상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남녀관계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만나 하나로 용해되는 것이다. 그것을 갈등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남녀 모두가 이런 사실을 의식한다면, 그들의 관계는 상반되는 시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된다. 이때, 남녀가 함께하는 삶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의 연속일 것이다. 물론 싸움에도 휴일은 있다. 하루 이십 사 시간 내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휴전 상태가 있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수천 년 동안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가장 이상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자녀를 몇 명씩이나 낳았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이방인이다. 남성과 여성의 접근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서로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 관계를 명상으로 삼지 않는 한, 평화로운 삶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남녀가 함께 사랑과 명상 속으로 들어가면 사랑의 체험은 자동적으로 명상적인 동료애가 된다. 명상이 그대의 의식을 일깨워서 그대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도록 남녀 각자 안에 사랑과 명상을 심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그대는 나와 함께 있을 때 깊은 조화를 느낀다. 평화와 사랑, 침묵이 넘쳐나는 순간을 느낀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오쇼와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일이 가능한데 왜 연인과 같이 있을 때는 불가능한가?"
그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대의 남편 또는 부인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그대의 사랑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몸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것이다.
둘째로, 그대는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명상의 관계이다. 명상이 그대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이다. 명상이 깊어질수록 그대의 사랑도 깊어질 것이다. 반대로, 그대의 사랑이 깊어지면 명상 또한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대는 남편과 명상으로 연결되어있지 못하다. 그대들은 서로의 의식을 느끼기 위해 단 한시간도 고요하게 앉아있은 적이 없다. 싸움을 하든 성관계를 하든 그대들은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부분, 호르몬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대는 상대방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핵심과 관계를 맺고있지 않다. 그대의 영혼은 상대방과 동떨어져 있다. 결혼식을 올린 것은 몸이고, 영혼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대의 연인과 조화로운 관계를 나누고 싶다면 그대는 더 명상적으로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 하나만 있을 때 그것은 장님과 같다. 명상이 거기에 눈을 달아준다. 명상은 사랑에게 이해를 선사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명상 둘다 충족되면 그대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가 된다. 이제 남편과 부인 사이의 통속적인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삶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서 서로 나누는 동지애가 된다.
남성 홀로, 또는 여성 홀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도 길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남녀간에 갈등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금욕주의를 도입하기로 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승려도 독신을 지켜야 하고 수녀도 독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5천년 역사 동안 그들 중에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 얼마나 되는가? 불교, 힌두교, 기독교, 모하메드교 등을 통털어 수 백만명의 독신 남녀 수행자들이 있지만 그들 중에 깨달은 사람을 꼽아보면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한다. 어찌된 일인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다. 목적지는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웃 집에 놀러 갈 때에도 양 다리가 필요하다. 한쪽 발로 깡충깡충 뛰어서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나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도입하고 있다. 깊은 우정과 사랑, 명상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의 전체(whole)를 이루고 있는 남녀는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적지는 그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폭풍의 중심, 그대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에 있다. 하지만 그 목적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없으면 전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두 부분이다.
그러니 싸움으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 남성은 여성의 눈으로 보도록 힘쓰고, 여성은 남성의 눈으로 보도록 힘쓰라. 두 개의 눈보다는 네 개의 눈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대는 완전한 시야를 갖게된다. 사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명상이 없으면 사랑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명상이 배제된 사랑은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전혀 없다. 물론 그대는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자기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깊은 곳에서 그대는 모든 사랑의 약속이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명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색채, 새로운 음악, 새로운 노래, 새로운 춤이 사랑 위에 펼쳐진다. 명상은 그대와 상반되는 극(極)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주고, 그 이해의 순간에 갈등은 봄눈 녹듯이 사라진다. 세상의 모든 갈등과 마찰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대가 어떤 말을 했는데 그대의 부인은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 부인이 무슨 말을 했는데 그대는 그것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 3,4십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산 부부도 처음으로 살림을 시작한 날처럼 마숙한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똑같은 불평이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하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4십년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상대방의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나는 명상을 통하지 않는 한 이해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본다. 명상은 그대에게 침묵과 각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귀기울여 듣는 자세,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나와 함께 있을 때에는 이해가 가능하다. 나는 그대 삶의 자잘한 일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대는 기본적으로 귀기울여 듣고 이해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그대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러므로 갈등의 문제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대는 나를 전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그대의 관계는 명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 또는 다른 남자와도 이렇게 조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자세를 갖고 임해야 한다.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제대로 된 약을 쓰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이 '약(medicine)'이라는 단어가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과 똑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약이 육체를 치료한다면 명상은 그대의 영혼을 치료한다. 약은 그대의 물질적인 부분을 치료하고, 명상은 그대의 영적인 부분을 치료한다.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정신은 상처 투성이다. 그래서 조그만 일로도 그렇게 아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 이해도 없이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재앙으로 끝나고 만다. 만일 그대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명상이다. 그대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도 명상이라는 선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명상이 훨씬 소중한 선물이다. 그리고 이 선물은 그대의 삶 또한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순수한 즐거움을 누릴 잠재력이 있다. 다만 그 방법을 모를 뿐이다.
혼자 살때 우리는 기껏해야 슬프고 외로울 뿐이다. 그런데 둘이 살면서부터 완전히 지옥이 된다. 장 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같은 최고의 지성인도 "타인인 지?quot;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타인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며 차라리 혼자 사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할 정도로 비관적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를 놓고 볼 때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명상이 함께 하면 타인은 그대의 천국이 된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명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서양인들의 비극이다. 서양인들은 명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삶을 꽃피우지 못하고 있다. 삶을 놓치고 있다는 점은 동양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인은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전체에 속한 두 개의 부분이듯이 사랑과 명상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은 남성이고 사랑은 여성이다. 명상과 사랑이 만나는 곳에 남성과 여성도 만난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우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초월적 인간을 창조한다. 지상에 이 초인을 창조해내지 못하는 한 희망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나의 사람들은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 출처 : 명상나라(내용: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