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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궁전'이 '구르는 지옥'으로

 
‘달리는 궁전’이 ‘구르는 지옥’으로
[한겨레] 포커스

20세기초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미국 시민들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앞으로 ‘달리는 궁전’을 모든 집에 하나씩 보급하겠다”고. ‘달리는 궁전’이란 자동차를 말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 박정희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1980년대엔 ‘마이 카’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실현됐다. 2005년 말 한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1539만대였으며, 서울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280만9천대, 경기는 350만6천대에 이르렀다.

국민 3명에 1명꼴의 자동차가 보급된 셈이다.

자동차의 광범한 보급으로 개인들은 자신들만의 독립적이고 고립적인 ‘궁전’을 하나씩 갖게 됐다. 자동차로 출퇴근하고 쇼핑하며 나들이하고 데이트하는 것이 현대 도시 생활을 표상이 됐다. 도시 중심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 주변부나 도시 바깥의 주택지로 떠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자동차 교통이 일반화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시의 수직적 확장(고층 빌딩)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도시의 수평적인 확장은 자동차가 시간적 거리를 단축함으로써 가능해졌다.

한국에서 강남 개발이나 분당·일산의 개발도 자동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일산이나 분당에서 서울의 도심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오롯이 자동차에 힘입은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일산은 연인들이 서울 밖으로 나들이 갔다가 마지막 열차를 놓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함으로써 첫 밤의 추억을 만들 만큼 서울에서 멀리 있었다.

분당도 마찬가지다. 1969년 정부와 서울시는 ‘도심 부적격’인 서울의 달동네·판자집 주민들 10만명 이상을 서울에서 먼 곳으로 강제로 옮겨놓았는데, 그 곳이 바로 분당이 속한 성남이다. 1971년 성남에서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자동차는 속도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한 생활권으로 묶어 도시의 팽창을 떠받치고 있다.

파리 퐁피두 센터의 공동 설계자인 리처드 로저스는 책 <도시 르네상스>(원제목 <한 작은 행성을 위한 도시들>)에서 자동차가 도시의 모습과 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지적했다. 자동차로 인해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사람들이 만나고 쉬는 장소였던 주택지의 골목, 건물 앞마당, 학교 운동장은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길과 거리에서 사람과 자전거, 전차가 밀려났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도시계획에서 핵심적 부분이 되면서 건물 배치, 도로 바닥 재료(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가로등, 난간, 도로 모서리 등 공공 공간이 형태와 재질이 자동차라는 기준에 의해 결정됐다.

차가 도시를 좀먹는다

자동차는 도시 건축도 크게 바꿔놓았다. 건물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예전의 도시가 재개발을 통해 띄엄띄엄 선 고층 건물로 채워지고 그 사이에 넉넉한 빈 공간이 차도와 주차장, 잔디밭으로 개조됐다. 이런 공간 개조의 양상은 상업·사무실 지역이나 주택 지역에서 모두 한가지였다.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건축가들이 1930년대 선언한 건축의 ‘기능주의’는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기능주의자들은 도시의 경제적 효율성·실용성을 높이기 위해 주거와 업무, 쇼핑, 공공 공간 등을 구분했으며, 이들 사이의 이동은 걷기나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를 이용하도록 설계했다. 또 한 지역도 햇빛과 공기, 바람을 충분히 확보한다며 고층 건물들과 이 사이의 빈 공간으로 나누었다.

도시는 팽창했고 문제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덴마크의 건축가인 얀 겔은 책 <삶이 있는 도시디자인>(원제목 <건물들 사이의 삶>)에서 자동차의 속도로 인해 도시의 건물과 표지판, 간판, 신호등 등이 불필요하게 크고 거칠게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접촉은 더 적어지고 미약해졌다. 이를테면 자동차를 탄 사람에게 길을 지나는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너무 미세해서 분간할 수 없는 것이 됐다.

이런 자동차 중심의 공간에서 사람들의 만남을 포함한 바깥 활동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얀 겔은 같은 책에서 “기능주의적 신도시와 주택지 개발은 바깥 활동의 감소와 흩어짐을 가져왔으며, 사람들의 거리 통행과 도시 공간에 머무름을 현저히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사례를 서울의 재개발 아파트 단지, 일산·분당 등 서울 주변의 신도시·신시가에서 봐왔다. 또 그 반대의 사례를 중구 명동 일대나 종로구 인사동·청진동·삼청동 일대에서 보고 있다.

외국에서도 기능주의적인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실패 사례는 적지 않다.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는 전형적인 기능주의적·자동차 중심적 도시다. 박용남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은 책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에서 이 곳을 자동차 의존형 도시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인용했다.

“… 전통적인 블록의 패턴을 와해시키고 도시의 기능이나 공동체의 결속력 약화를 가져온다. 한 마디로 살아 숨쉬는 도시의 느낌도 사람 사는 맛도 나지 않는 황폐한 도시의 전형이었다. … 이 도시는 일하고 쇼핑하고 노는 기능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건설되었다. 이들 지역을 주로 도로로 연결하는 등 거의 교차 지점이 없이 건설된 ‘고속도로 도시’였다. ” 브라질리아는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와 함께 기능주의적 도시계획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히고 있다.

자동차는 도시에서 인간관계의 변화까지 가져왔다. 1970~1971년 미국의 애플야드와 린텔은 ‘도시 거리의 환경적 품질’이라는 연구에서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지역에선 인간관계도 소원해진다는 점을 샌프란시스코의 세 거리를 조사해 증명했다. 이들의 연구를 보면, 하루에 2천대의 차가 지나는 길가의 동네에선 한 사람마다 친구가 3명, 아는 사람이 6.3명이었으나, 하루 8천대가 지나는 동네에선 친구가 1.3명, 아는 사람이 4.1명, 하루 1만6천대가 지나는 동네에선 친구 0.9명, 아는 사람 3.1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차가 많이 다니므로써 차도 건너 편은 물론이고 같은 쪽의 이웃과도 자주 만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 소음, 먼지와 매연이 사람들이 거리로, 길 건너 편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수평적인 길과 거리로 연결된 예전의 동네들과 수직적인 엘리베이터와 층계로 연결된 요즘의 아파트 단지의 친구와 아는 사람을 비교해도 아마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자동차 중심 도시를 바꾸는 길은 자동차 교통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이를 대중교통으로 돌리는 것뿐이다. 2004년 말 기준으로 서울의 수송 분담률은 지하철 35.8%, 승용차 26.4%, 버스 26.2%, 택시 6.6%로 아직 승용차가 버스보다 더 높거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런던시 “승용차 더 줄인다” 압박

이에 비해 영국 런던은 출퇴근 때 지하철 이용자의 비중이 90%가 넘는다. 런던의 차도는 보통 편도 2차로로 매우 좁지만 서울에 비해 덜 막히며, 인도는 서울보다 더 걸어다니기에 편리하고 안전하다. 심지어 런던은 도심의 승용차를 더 줄이겠다며 2003년 도심 전체에서 1만5천원 가량의 혼잡통행료를 물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중심에서 벗어나는 또 한 가지 길은 현재처럼 단일 기능의 고층 건물이 성기게 들어선 도시계획을 피하고 건물과 건물이 어깨를 맞대고 길과 거리를 향한 열려있는 밀집·복합형 도시계획을 장려하는 것이다. 리처드 로저스는 이런 밀집·복합형 도시가 서로 다른 집단들이 가까이 생활하고 교류하는 사회적 장점과 통합적 도시계획으로 자원을 적게 소비하고 오염을 최소화하며 도시 바깥의 녹지를 덜 훼손하는 환경적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또 이런 밀집·복합형 도시는 이동 거리를 줄임으로써 걷기나 자전거, 대중교통 이용을 늘리며, 자동차 이용을 억제한다. 도시 공간이 넓어질수록 자동차 이용이 늘어나고 대중교통 수단의 보급이 어렵다는 점은 미국 도시들의 사례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자동차가 ‘칼’과 같은 도구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칼은 적절한 목적에 적당한 정도로 사용할 때 쓸모있는 도구이며, 그 범위를 넘어서면 ‘흉기’가 될 수도 있다. 헨리 포드의 말과 달리 자동차는 결코 ‘달리는 궁전’이 될 수 없다. 왕이 궁전에서 폼 잡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의 아랫돌들처럼 받쳐주고 희생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달리는 궁전’에 살려고 한다면 그 사회는 ‘달리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모두가 자동차의 편의만을 추구한다면 ‘흉기로 변한 칼’인 자동차는 사람들을 해치고 불건강하게 하며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를 병들게 하는 주범 가운데 하나는 자동차이며, 이 문제의 해법은 자동차를 적게 사용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사랑하고 자동차 타기를 즐기는 당신, 계속 자동차를 위한 도시에 살 것인가?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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