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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이 입에 밴 아이들

교실에서… 채팅하며… 욕이 입에 밴 아이들
기획/욕하는 아이들(1면 박스)

▲ 교실

서울 목동 한 초등학교 바이올린 수업. 특기적성과목을 맡은 A(25ㆍ여) 교사는 키가 작은 편이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그를 “존만한 X”이라고 불렀다.

한 아이의 입에서 그만 그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욕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교사는 교실을 뛰쳐나갔고 아이들은 기뻐했다. 욕을 한 아이는 “담탱이(담임 선생님)한테 걸려 캡숑(많이) 혼났지만 재미있었다”고 했다.

▲ 분식집

서울 강북의 한 초등학교 부근 가게. 떡볶이를 먹고있는 3명의 아이(6학년)는 단짝 친구. 방과후엔 늘 함께 지낸다. 쉴새 없이 떠들었다. “X새끼, 존니 쳐먹네, X발!” “존나 맛있다, X발!” 주위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주인 아줌마도 덤덤하다. “친구에게 욕하면 쓰냐”고 말하자 “왜요, 왜요? 맨 날 쓰는데… 재미있잖아요.”

▲ PC방

채팅사이트‘11~13 모여!’. 11~13세 아이들의 대화방이다. 씨발수학공책님(13세 여):존나 승질 박박 긁는 울 담탱이 재수없어. X발/ 존나졸려님(11세 여):지랄, 깝싸네(까분다).

존나 밟아. X발 정주(남자친구)새끼 왜 안 들어와. X팔…. ‘물어볼게 있다’며 기자가 대화에 끼어 들었다. “욕은 왜 그렇게 하세요?”라고 썼다. 즉각 “헉~ 미친, 바보 아냠?”이라는 대화가 떴다.

신분을 밝히자 욕설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우리끼리 하는데 뭐가 문제냐” “중학생 고등학생 언니들은 더 한다”는 대화가 돌아왔다.




‘욕하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아이들은 그냥 말하는 법이 없다. 호칭과 부사, 끝말은 모두 욕이다. 추워도 “X발 졸라 춥고”, 좋아도 “존니 좋다.” 친구는 무조건 “X새끼” “개새끼” “미친 새끼” 다. “재미있고 멋있어서”가 이유다. 욕을 하는 아이도, 듣는 아이도 낯빛하나 변하지 않는다.

송파구에 사는 가영(가명ㆍ12ㆍ여)은 평범한 초등학교 6학년이다. 알고 있는 욕을 물어봤다. 망설이더니 “X같네, X발, 싹스, 창년아, 개새끼, 존니, 존나, 졸라, 지랄…” 끝없이 이어졌다. “더 재미나고, 무섭고, 신나는 욕이 있는데 생각이 안나요.”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와 통화 내내 욕을 했다.

가영은 “욕을 안 쓰면 친구들과 이야기가 안 된다”고 답했다. 하지만 집에선 절대로 욕을 하지 않는다. 한번은 엄마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 엄마가 욕하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우리 가영인 욕 안 하지? 저 이이는 문제아인가 봐.” 가영인 속으로 ‘휴~ 살았다’고 생각했다.

욕 권하는 사회

영화 드라마 라디오 등 대중매체들이 욕을 ‘가볍게’ 권하고 있다. “X발, 존나” 등은 영화의 재미를 살리는 양념이고, 라디오 DJ의 욕은 진행을 위한 윤활유로 통한다.

교사들은 속수무책이다. “예전 아이들도 욕을 했죠. 화나고 짜증날 때 그랬어요. 야단치면 잘못을 인정했죠. 요즘엔 달라요. 욕의 의미가 약해진 대신 일상어처럼 된 거죠. 나무라면 ‘왜요, 왜요?’ 되물어요. TV나 영화에 다 나왔다는 거죠.” 서울 G초등학교 이모(56) 교감의 넋두리다.

접근이 쉬운 대중매체는 ‘욕의 평준화 시대’를 열었다. S유치원 윤모(25ㆍ여) 교사는 “바보, 멍청이 정도만 알던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어른이 하는 욕을 하길래 물었더니 전날 부모랑 본 영화 때문이더라”라고 했다. 남보다 튀기 위한 ‘욕 경쟁’도 일상사다. 한 6학년 여학생은 “멋진 욕을 배우기 위해 중학생 언니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멋진 욕을 배워오면 여학생들에게 인기를 끈다”는 남학생도 있었다.

인터넷 역시 주범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또래집단을 형성한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과 채팅 문화를 통해 욕을 학습하고 실생활에 응용한다.

어릴 때 버릇은 나이가 들더라도 떨어지지 않는 법. 정치권이나 상아탑도 욕의 주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울대에 출강하는 최모(45) 교수는 “고교시절 우등생이었을 서울대 여학생들이 복도에서 스스럼없이 욕을 해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두 말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언어습관을 교정할 시기를 놓친다는 것도 문제다. 그들의 욕은 또래집단과 인터넷, 익명의 울타리 안에서 활개친다. 부모와 담임 교사는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야단맞을까 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선 욕으로 도배를 해도 그만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이들이 욕을 쓰는 공간은 지하철과 버스, 놀이공간, 거리 등에서다. 한 초등학교 교사(5학년 담임)는 “조사해 보니 아이들이 쓰는 욕이 무려 20개가 넘었다”며 놀랐다. 그는 “친구끼리 평소에 욕을 쓰는지 물어봤더니 40명 중 35명이 손을 들었다”고도 했다.

뾰족한 지도방법도 없어 보인다. 인천의 이모(30) 교사는 “통제가 안 된다. 언론조차 욕설문화를 ‘반항의 문화코드’ 운운하지 않느냐. 언어폭력에 대한 교육을 교과과정에 맞춰 실시하면 그때 뿐이다.

부모들도 사정을 모른다. 형제가 없으니 집에선 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학부모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욕설 매체’는 넘쳐 나는데 교사는 힘이 없다. 부모와 사회가 돕지 않는 한…”

서울교대 황정현(국어교육) 교수는 “인터넷, 대중매체 등 아이들의 의사소통 네트워크가 넓어지면서 언어교육을 담당할 주체가 사라졌다. 학교는 힘이 없고, 가정은 무지하며, 사회는 무책임하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무너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철에서 만난 한 여중생이 말했다. “X발, 어른들은 존나 하면서 왜 우리한테만 지랄인지 몰라. 다 (어른들한테) 배운건데, X발.” 욕을 하고 있었지만 불량학생으로 보이진 않았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고찬유기자 jutd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