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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가 무서워지는 세상’ 인터넷실명제의 폐해

 
‘말 한마디가 무서워지는 세상’ 인터넷실명제의 폐해

[기고] 인터넷실명제는 사이버 폭력의 원인 규명도 없이 내놓은 잘못된 처방전
무분별하게 수집된 개인정보 관리도 문제…“프라이버시·인권 교육이 급선무”

미디어다음 /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국 김정우

올해 초 한 평범한 학생이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의 이목을 끌었다.

학생이 한 일은 간단했다. 그는 쉬는 시간에 교실 칠판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놓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 뒤 사진을 실명으로 운영되는 한 포털사이트의 미니홈피에 올렸다.

학생이 올린 사진은 누리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 학생은 ‘천사 소년’이라는 별명까지 얻기에 이르렀다. 이 별명은 각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순위에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학생이 미니홈피 프로필 게시판에 자신이 싫어하는 가수라며 한 그룹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학생은 순식간에 해당 그룹의 팬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후 학생은 결국 자신의 미니홈피를 폐쇄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인터넷 실명제와 관련해 우리에게 많은 점들을 시사한다. 우선 이 일은 ▲실명제 게시판에서는 개인의 사적인 의견을 올려놓는 것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실명제 게시판에서는 민감한 개인정보가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오히려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사이버 폭력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실명제 게시판에서도 욕설과 비난은 여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개똥녀’ 사건이 익명성 때문?
해당 여성 식별정보 노출이 더 큰 문제



얼마 전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아서 문제가 된 여성이 누리꾼들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은 그 여성을 식별할 수 있는 사진과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올라온 후 누리꾼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며칠 전 정보통신부는 사이버 폭력의 주요 원인이 인터넷 익명성에 있다면서,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통부는 익명성이 왜 사이버 폭력의 주요 원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정통부가 사이버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장하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익명성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사이버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는 ‘연예인 X파일’사건. 이 사건은 제일기획이라는 회사가 연예인들의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무책임하게 유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것의 직접적인 원인을 익명성으로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얼마 전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은 한 여성이 누리꾼들한테서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은 그 여성을 식별할 수 있는 사진과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올라온 뒤 누리꾼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프라이버시 침해와 마녀사냥식의 여론재판을 받은 것이다. 정통부가 이런 문제들의 원인을 익명성으로만 한정해서 보는 것은 잘못된 원인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디만 보인다고 익명이라 생각하면 오산

현재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정말 익명으로 운영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와 민간 홈페이지는 회원 가입 시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개인을 인증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댓글을 쓸 때조차도 먼저 로그인을 해야만 하는 사이트들이 늘고 있다. 이렇게 실명제로 운영되는 게시판에서도 사이버 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며, 천사 소년의 사례와 같이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또 다른 인권침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로그인을 했을 때, 실명이 아니라 아이디만 보인다고 해서 익명 게시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로그인을 하고 글을 쓰게 되면 누가 썼는지, 언제 썼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서버에 남게 되고, 글쓴이가 누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에서 개인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제도의 하나로, 사이버 감시체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글을 쓸 때 개인 인증을 해야 한다면, 인터넷에서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올리는지 정부나 인터넷 사업자가 쉽게 모니터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정부 정책이나 정치인에 대한 과감한 비판이나 용감한 고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오히려 이것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통신비밀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도 있다.

이미 무분별한 개인정보 수집 위험수위


지난 5월 17일 오후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사이버 폭력 대책 토론회' [사진=연합뉴스]
더욱 큰 문제는 인터넷 실명제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정보 유출과 이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제2, 제3의 문제들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하기 위해서는 사이트 운영자가 개인인증에 필요한 주민등록번호나 실명을 수집해야 하며, 상시적인 확인을 위해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이용자 수가 30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인터넷 실명제를 위한 개인인증 데이터베이스는 엄청난 규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베이스는 언제나 유출의 위험을 안고 있다.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한다고 하더라도 해킹에 의한 유출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으며, 내부자에 의한 유출은 근본적으로 막기 힘들다.

“인기 포털사이트 3000만 명 주민등록번호, 실명, 아이디 유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 인터넷 사이트들은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필요 없는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 번 유출된 개인정보는 악용될 소지도 높다.

벌써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나 아이디를 도용한 사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자신의 아이디와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인터넷에 올라간 글 때문에 난데없이 고소·고발을 당할지도 모른다.

프라이버시 등 인권감수성 부재가 더 큰 문제

사이버인권침해와 폭력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원인 규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효성도 증명되지 않은 인터넷 실명제를 졸속으로 도입하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처방이다.

사이버 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타인의 프라이버시나 인권에 대한 불감증,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이런 인권에 대한 교육을 전혀 실시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이버 폭력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인권에 대한 의식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사회적 교육과 캠페인을 벌여나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또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수집할 경우 오히려 인터넷 사용자들이 사이버 폭력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즉 주민등록번호 등 민감한 정보는 아예 수집하지 못하도록 하고, 설사 수집한다 해도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제부터라도 정부는 사이버 폭력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원인 규명과 함께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보호하면서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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