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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하는 소비자, 강요된 소비를 거부한다

나는 생각하는 소비자, 강요된 소비를 거부한다

[기획] 소비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생필품·유기농채소 생산에 공동육아까지
충실한 삶 넘어 ‘소비천국’·‘우상화된 시장’에 대한 소박하고 조용한 항거로

미디어다음 / 취재팀



소비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






느리지만 값지고, 불편하지만 아름다운 '참살이'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아침에 일어나 ○○비누로 세수를 하고, ○○○○샴푸로 머리를 감고, 오전에 오기로 한 ○○정수기 아줌마를 기다려 정수기 필터교환을 하고, 정수한 물을 마시며 조금 쉬다가… 오후가 되면 외출준비를 하고, 전에 발급받은 ○○카드를 들고나가 펜싱, 헬스, 쇼핑을 하고 나이트클럽에 가는 등 정신없이 보내다가 밤이 돼 돌아왔는데… 이어지는 남편의 화려한 이벤트. 냉장고를 둘러싼 수십 개의 초와 함께 팔 떨어질 정도로 무거운 꽃다발에 파묻힌다. 그리고 파티에 가기 위해 ○○○핸드폰을 들고 이브닝드레스를 챙겨 입는다.’

수년 전 인터넷 유머 게시판을 장식했던 한 유명 여자 연예인의 하루를 패러디한 글이다. 유명 여배우가 등장하는 광고만 모아 놓아도 하루의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이 글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소비와 광고의 홍수 속에 파묻혀 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뜬 ○○○, 쏟아지는 여름 햇살에 타고난 뽀얀 피부를 지키기 위해 자외선 차단제를 정성들여 바르고 외출준비를 한다. 외출 직전 그녀는 신세대의 필수품인 멤버십카드를 지갑에 챙긴다. 커피전문점에서 패밀리레스토랑까지 빼놓지 않고 할인 받기 위해서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요즘 유행하는 복싱과 검도로 땀을 뺀다. 취침 전 다시 나이트용 미백 화장품으로 피부를 손질한 뒤 잠자리에 든다. 주말로 예정된 남자친구와의 그림 같은 제주도여행을 미리 꿈꾸면서.’

화학 성분이 포함되지 않은 천연 화장수로 자신이 쓸 화장품을 만들어보는 민우회 회원들. ⓒ미디어다음

뒤이어 광고계를 평정한 한 신세대 여배우의 광고속 하루도 ‘소비천국’으로 전락한 현대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명언은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패러디된다. ‘소비의 미래’를 쓴 독일의 경제학자 다비트 보스하르트가 언급한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 행위가 현대인의 ‘존재 이유’가 되고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고 있음을 꼬집는다.

현대인들은 소비를 통해 의식주를 해결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교육을 받고 육아를 한다. 물론 소비 행위에도 순기능은 적지 않다. 소비는 노동의 대가일 뿐 아니라, 산업과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된다. 때로는 불우한 이웃을 위한 나눔과 배려의 소비도 있다. 기업의 고용 창출을 촉진해 내일의 생산을 위한 재투자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소비 행위는 생산 행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리고 있으며, 이는 건전하고 책임있는 소비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산적인 소비란 무엇일까.
강요된 소비자가 아닌 참여하는 주체가 되자



이 때문에 “생산적인 소비 행위에는 ‘소비자 주권주의’에 입각한 윤리 정신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단순히 의미없이 낭비하는 소비자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소비자,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소비자, 타인의 삶을 배려하는 사려깊은 소비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이 같은 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강요받는 소비자'이기를 거부하고 ‘참여하는 삶의 주체’ 즉 자신의 삶의 생산자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주부 김순아(39)씨의 생활은 여배우의 일상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행복으로 충만하다.
김씨는 직접 만든 빨래 비누로 세탁을 하고, 역시 직접 천연 재료들로 천연 화장수와 비누 등을 만들어 쓴다. “화학 성분이 없어서 너무 좋고 자신의 피부 체질에 따른 ‘맞춤’ 화장품을 만들어 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 김씨는 또 일회용 생리대 대신 면생리대를 빨아서 사용하고, 유행에 뒤떨어진 옷은 버리지 않고 직접 재봉틀로 수선해 입는다. 여가 시간에는 봉사단체인 햇살교실에서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돌본다.

진정한 '참살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서너 평 남짓한 텃밭을 스스로 가꿔 유기농 야채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한다. ⓒ 미디어다음

직장인 황준영씨는 ‘품앗이 육아’를 토대로 한 ‘공동육아’의 조합원이다. 당번이 되면 놀이방 청소도 해주고, 아이들이 나들이 갈 때는 운전기사가 되기도 한다. 교사의 비번에는 직접 교사가 돼서 자신의 쌍둥이 아이들은 물론 이웃 아이까지 돌본다.

남충진(40)씨는 서너 평 남짓한 텃밭을 스스로 가꿔 유기농 야채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식구들만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민우회가 운영하는 생활협동조합의 운영에 참여해 산지를 직접 방문, 생산지를 견학하고 자신과 가족의 먹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꼼꼼히 살핀다. 농약을 살포해 대량 생산하는 농산물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유기농가와의 끈끈한 ‘관계’를 통해 먹거리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기울이는 조합원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고집하는 삶의 철학에는 공통점이 있다.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고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생태적인 삶,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과 지역 공동체를 배려하는 공동체적인 삶이 그것이다.

참살이를 뜻하는 '웰빙' 문화마저 외국의 소비문화를 무분별하게 수입하는데 그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참살이’는 느리지만 값지다. 불편하지만 아름답다.

이들의 행위는 언뜻 보기엔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싶다는 소박한 의지의 표현이지만 어찌보면 ‘시장의 우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현 사회에 대한 조용한 항거일지도 모른다.

미디어다음은 여성민우회 회원들의 ‘만들어쓰기’ 운동과 의료 소비자의 주권을 실천하는 ‘생협 이야기’, ‘공동육아방’과 ‘지역화폐 운동’ 등을 통해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지만 몸소 생산의 기쁨과 철학을 실천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봤다.